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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강복선은 27세 때인 1908년 4월에 이익삼 의병부대에 들어가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2차 의병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부대로, 30~4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활동지는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였다. 1908년 1월에서 1909년 6월까지 군수금을 모집하고 교전 활동을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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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명화는 용인군 모현면 부계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을 무렵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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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사근은 농사를 짓다가 1907년 임오교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수백 명의 의병들과 함께 경기도 죽산·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초에는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경기도 용인·죽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원 의병부대가 당진 주재소를 습격하는 반일 항전을 일으켰을 때 여본구리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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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김순일은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부대장이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8월에는 군대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군대 해산은 이전의 의병 운동을 의병 전쟁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투쟁에 가담하였다.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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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장옥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를 주무대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항일 유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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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재천은 26세의 나이에 이익삼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제2차 용인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제2차 의병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부대로, 30~4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활동지는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였으며, 1908년 1월에서 1909년 6월까지 군수금 모집과 교전 활동을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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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김정석은 출생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장한 후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동진리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한편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이덕경 부대에 투신하여 의병이 되었다. 이덕경의 의병 활동으로 현재 알려진 것은 주로 군수품 확보 투쟁에 관한 것이다. 1909년 6월 의병장 이덕경 및 동료 의병 1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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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의 금령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장. 본관은 언양.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이다. 증조부는 김응복(金應福), 할아버지는 김식(金湜), 아버지는 김중기(金重器)이며, 외할아버지는 이용(李蓉), 부인은 박덕창(朴德昌)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고, 1578년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15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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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서흥(瑞興). 자(字)는 여문(汝文), 호(號)는 창죽헌(倉竹軒)이다. 아버지는 충무위 부사과 김린(金燐)이다. 죽산부 양지현(陽智縣) 월노동(月老洞)[현재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에서 태어났다. 1555년(명종 10) 6세 때 서당(書堂)에서 글을 깨우쳐 즉흥시를 지었으며, 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그 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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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서흥(瑞興). 할아버지는 충무위 부사과 김린(金燐)이고, 아버지는 김충수(金忠守)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버지 김충수가 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하여 10월 말경에 죽산(竹山)의 청용산(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옥신리 경계)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倭將) 후쿠시마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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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현수는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1909년 음력 3월 10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소운동의 이재봉(李在鳳)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징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끌고 경기도 용인군 고석동(古石洞) 덕현(德峴)으로 가서 군자금 5원을 거두었다. 그 후 이익삼 의병장과 더불어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금현 김종옥(金鍾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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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남현수는 경기도 이천군 장면 사곡동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07년 이익삼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이후 고향인 경기도 용인군에서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남현수는 부대 내에서 군수품 확보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윤2월 의병장 이익삼 등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금현에 진출하여 김종옥으로부터 백미 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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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의병. 1727년(영조3) 청주에서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때 문성천은 양지현(지금의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 거주하던 가의대부(嘉義大夫) 주헌(朱櫶)이 의병을 모집하자 그를 도와 좌찬현(佐贊峴)에서 서울로 진격하는 적을 막고 수백 여 명을 죽였다. 이 일이 임금께 보고되었으나 상을 받지 못하였다가, 1785년 경기관찰사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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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남평. 자는 순해(舜諧) 또는 순서(舜瑞), 호는 휴헌(休軒). 아버지는 현령 문위세(文緯世)이며, 큰아버지인 첨지중추부사 문위지(文緯地)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용인향교의 학생으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문위세와 함께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용담(龍潭)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치열한 항전을 벌였고 세 번이나 크게 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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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박춘식은 경기도 용인군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07년 7월 김봉기 의병부대에 들어가 군자금 확보와 의병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는 동료 의병과 함께 광주·양천·지평·가평·춘천·횡성·화천·양구 등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양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가평 실운리에 있는 명례궁(明禮宮) 사음(舍音) 집에서 백미 50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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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송교원은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벌였다. 정주원 의병부대는 임옥여 의병부대·이익삼 의병부대와 함께 2차 용인의병운동(1904~1909)을 이끈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죽산·양지 외에 수원·안성·당진·면천·풍도·서산까지 넓은 활동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주원 의병부대의 활동은 크게 일본군과의 교전을 통한 대일 항쟁과 이를 뒷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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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송금봉은 박춘식의 권유에 의해 의병이 되었다. 그는 김봉기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경기도 광주·용인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박춘식·홍금만·유태수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주로 군자금을 수집하면서 대일 항전을 펼쳤다. 1908년 2월 11일 경기도 용인군 마가리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고, 또 경기도 광주군 전지리에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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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신순용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후 용인·광주·앙지·죽산·양성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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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안춘경은 정주원 의병부대에서 활약했다. 정주원은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 등의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1907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기도의 용인·양지·양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부대 규모는 경기도 용인 굴암에서 조직된 3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양지·양성에서 약 15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조직이 확대되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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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우덕순은 본래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어매동에 거주하는 농부였는데, 1907년 김순일 의병부대에 필요한 군자금을 확보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1907년 11월과 1908년 7월경에 각각 300냥을 모금하여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의병들에 대한 군자금 및 군수품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1908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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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우수안은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어매동에 거주하는 농부였다. 한일의정서 체결과 고문 정치로 대변되는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정치·군사적 간섭이 강화되던 시기에 의병 활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용인군 지역에서는 일본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경의선·경원선 철도 부설 추진과 이에 따른 인력 강제동원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에 저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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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 전투에 참여한 의병.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광보(廣甫).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의 차남으로 태어나 큰집인 원수량의 양자로 갔다.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된 원균(元均)의 동생이다. 경기도 송탄시 도일동(현재 경기도 평택시 송탄동)에서 태어났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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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의병장. 본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묵계(墨溪)이다. 할아버지는 부제학 유윤덕(柳潤德)이고, 생부(生父)는 유성(柳城), 양부는 참봉인 유지(柳墀)이다. 유복기(柳復起)와 유복립(柳復立) 형제는 외가에 맡겨져 외조부의 손에서 컸으며 외숙인 학봉 김성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음보로 종부시주부(宗溥寺主簿)가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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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유태수는 박춘식·홍금만·송금봉 등과 함께 김봉기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경기도 광주·용인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주로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대일 항전을 펼쳤다. 1908년 2월 11일 경기도 용인군 성산리와 마가리에서 군자금 마련에 공을 세웠고, 경기도 광주군 전지리에 있는 서랑청의 집에서 다시 군자금을 수합하다가 피체되었다. 이로써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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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이금만은 1907년 7월 윤성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경기도 용인·여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경기도 여주군 일본 경찰분파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2명을 총기로 사살하는 등 무장 투쟁을 벌였다. 또 경기도 용인군 두미동에 들어가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피체되었다. 그는 1908년 3월 2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종신유형을 받았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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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이윤빈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갈월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지내던 중,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1909년 11월 19일 동료 정기인(鄭基仁)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군 상동막리 이장 허성습(許性習)과 실촌면 상열미리 이장 강성유(姜性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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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근거지로 광주·죽산·양성 등지를 넘나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부하 30~40명과 함께 친일파에 대한 징치, 일본 경찰 습격, 빈민 구제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일시적으로 관(官)에 자수하였으나, 다시 봉기하여 활약하다가 1909년 6월에 다시 붙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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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이치옥은 농사를 짓다가 1908년 2월 경기도 통진군 학당골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장 정용대 부대에 투신하면서 의병이 되었다. 이치옥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통진·고양·교하 등지이다. 1908년 4월 동료 의병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에 진출하여 군수품을 수집하였고, 의병을 사칭하고 다니는 자를 응징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25일 피체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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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이하경은 경기도 양평군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08년 경기도 용인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동료 6~7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 마련에 힘썼다. 그는 경기도 용인군 신원리(新院里)·자미리(自味里)·능동(陵洞) 등을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붙잡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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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임허옥은 1907년 8월 윤관문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경기도 용인·안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동지 6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요봉동을 거쳐 곽이동과 업이동에서 군자금품을 징수하였다. 이틀 후 안성군으로 가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탈출하여 그 해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8년 4월 다시 의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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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기인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쇠래(釗來)에 이주해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7년 10월부터 이익삼 의병장 휘하로 들어가 동료 2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동(陵洞) 원촌(院村), 포곡면 둔전리, 수여면(水餘面) 방축리(防築里), 수여면 김량장, 하동면(下東面) 삼배위(三倍尉), 포곡면 두계위리(杜溪尉里), 광주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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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대준은 경기도 용인군의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던 정주원 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의병 활동을 알 수는 없으나, 정주원 부대에 속했던 죽산 출신 의병 신현구[1878~1909] 등과 함께 1909년 6월 3일에 경기도 죽산군 서삼면 시암장 내 여인숙 김운선 집에 들어가 일본인 중원방길(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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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원경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으로 이주해온 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8년 3월경부터 이익삼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김장옥·정기인 등 20여 명과 같이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 하동면 삼배위(三倍尉)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1910년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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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정주원(鄭周源)[1870~1908]은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하수리(荷壽里) 사람이다. 그는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8월에 떨쳐 일어나 의병에 참여하였다. 정주원은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정주원은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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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조성습은 제2차 용인의병(1904~1909)을 이끈 정주원 의병부대 소속이었다. 정주원은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 등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1907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기도의 용인·양지·양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부대 규모는 용인 굴암에서 조직된 3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양지·양성에서 약 150여 명으로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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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조윤봉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곡리로 이주하여 살다가 1908년 2월 이익삼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는 의병 운동에 필요한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매진하였다. 의병이 된 직후 동료 의병 22명과 함께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수반리에 진출하여, 이장 마춘화를 통해 주민으로부터 군자금 25원을 확복하고, 곧이어 같은 면 역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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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의병.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 때 의병을 모집하여, 문성천(文星天)과 함께 죽산현과 양지현 부근의 좌찬현(左贊峴)에서 수백 명의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원종록에 들었으며, 사후인 1788년(정조 12)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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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최국만은 정주원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51세의 나이로 의병 활동을 하던 그는 1908년 12월 23일 경기도 평택군 남면 월정리 양석환의 집에서 군자금을 징취하였다가 탐지되어 일본인 수사와 헌병대 합동수사대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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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한순팔은 용인의 대표적인 의병부대인 정주원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의 출생과 경력을 확인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의병 활동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순팔이 가담한 정주원 의병부대가 서용범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양지·양성에서 또한 150명을 인솔한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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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홍금만은 1907년 7월 19일 정철화 의병부대가 마을을 지날 때, 부대의 짐꾼으로 역할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기도 죽산, 충청도 충주·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충주 방여탄에서 일본군과 교전할 때 부대와 떨어지게 되어 일시 귀향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2월 경기도 용인군 출신의 의병 박춘식의 권유를 받고 유태수·송금봉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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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황명운은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정주원(鄭周源)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그가 참가한 정주원 의병부대는 1907년 8월에 거의하여 용인·죽산·안성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배를 타고 충청남도 당진·서산 등지에까지 진출하면서 대일 항전을 하였다. 이같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의병부대는 190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