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D0200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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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Jukchang Lee Sijik Seonsaeng |
영어의미역 | Master Jukchang Lee Sijik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양화 |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성유(聖兪)이며 호는 죽창(竹窓)이다. 1572년 8월 18일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라 10세 때 조부를 따라 강동(江東) 임소(任所)에 있었을 때 귀양살이 중인 조호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 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따랐으며 그 역시 마음을 허락하였다. 160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나 광해군의 세도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면서 몇 칸의 집을 짓고 독서와 송죽(松竹)을 벗삼아 유유자적하였다.
1623년(인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서(司書), 별제(別提)에 올랐고 이듬해인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에 왕을 호종하여 정언(正言)을 배수하였으며 화의를 배척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환도 후에 병조정랑을 제수 받았으나 벼슬을 버리고 일시 귀향하였다가 바로 여산군수로 나아가 토호 세력들의 기세를 꺾어 선치하여 고을 백성들이 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뒤이어 장령, 필선 장학원정, 사복시정 등과 태상시의 장을 거쳤다. 태상시는 본래 부정의 소굴이어서 공이 그 부조리를 파헤치고 모함을 받아 벼슬을 내놓았으나, 전조(銓曹: 감사원과 같음)에서 그 억울함을 임금께 아뢰어 직위가 환원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하였는데 이때 대신 이하가 순절하기는 하였으나 가장 명백하게 절의가 나타난 사람은 공을 비롯한 4명에 불과하였다. 또 강도(강화) 사람들은 그 땅에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니 지금 전해오고 있는 충열사(忠烈祠)이다. 공이 졸한 해가 1637년이요, 춘추 66세였다. 처음에는 난이 끝난 후에 문의현(文義縣) 형강(刑江) 동쪽에 장사하였다가 후에 용인 선산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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