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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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仁-同族村紀行 |
영어음역 | Yonginui Dongjokchon Gihaeng |
영어의미역 | Travling Yongin Clan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양화 |
[개설]
동족촌이란 일반적으로 마을 주민 대다수가 동성동본(同姓同本)의 혈연으로 이루어진 촌락을 가리킨다. 집성촌과 비슷하긴 하지만 보다 혈연적으로 가까운 씨족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조상의 제사를 함께 지내며 동족 간의 상부상조를 위한 조직을 갖추어 집단행동을 취하는데, 이는 마을의 모든 생활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동족촌 안에는 기본적으로 종가와 사당, 재실, 서원, 모정, 장승, 위답(位畓) 및 효열각 등 선조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동 시설이 있다.
[동족촌 형성 동기]
용인 지역에서 동족촌이 형성된 데는 크게 혼맥에 의한 경우와 사거(死居), 즉 묘소로 인한 경우로 나눠 볼 수 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도 있듯이 용인은 예부터 명당과 길지가 많은 곳으로 이름나 있는데, 이를 증명하듯 수많은 명현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또한, 사패지(賜牌地)라고 해서 나라에서 일정한 토지를 문중에 내려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역시 동족촌이 형성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사패지는 현재까지도 유지되어 종중(宗中)의 중요한 재산이자 문중의 결속과 동질성을 유지하는 데 모태가 되고 있다. 특히 동족촌이 집중적으로 형성된 조선시대는 조상 숭배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사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이 영향을 받아 제사를 중요시하였고, 이를 위해서도 동족촌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동족촌은 또한 사회생활면에서도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무엇보다 동족촌이 형성되어 혈족 의식이 강화됨으로써 가문이 번창했고, 경제적으로는 토지와 농기구의 공동 이용, 협동 작업 등을 통해 생산성의 증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육적인 면에서는 서원과 문묘 등 공동의 교육 시설을 통해 후손들을 양성하여 과거에 급제시킴으로써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이점이 강했다.
[동족촌의 입지]
한강(漢江) 이남에서 용인 지역은 인접한 시군에 비해 산지와 구릉이 비교적 많은 지형이다. 동족촌이 교통상의 요지나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경우는 간혹 있으나 그러한 곳에 동족촌이 새로 형성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인 지역의 동족촌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나 계곡, 분지 지형 등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곳은 풍수에서 말하는 소위 장풍득수(藏風得水)에 알맞은 곳들이다.
산록(山麓) 입지와 배산임수의 입지가 많다는 것은 동족촌의 입지에 풍수지리설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인 지역의 동족촌에는 특히 당산나무나 정자목이라고 부르는 비보림(裨補林)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모두 풍수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마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현재 동족촌에 남아 있는 당산나무들은 대부분 용인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동족촌의 해체]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사회가 급속하게 변하면서 동족촌 역시 해체되어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동족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용인 지역의 동족촌 또한 고속도로를 비롯한 교통의 발달과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온전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몇 곳 되지 않는다.
특히 난개발로 불릴 만큼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던 수지구와 기흥구 일대의 동족촌의 경우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경우도 많았다. 현재 용인 지역에서 그나마 옛 모양의 동족촌을 볼 수 있는 곳은 개발에서 소외되어 비교적 전통적인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처인구의 일부 지역이다.
[용인의 대표적 동족촌 갈월마을]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 있는 갈월마을은 연안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용인의 대표적인 동족촌이다. 용인과 광주를 잇는 국도 45호선을 서쪽에 두고 동으로는 노고봉과 정광산이 솟아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동쪽으로 산을 등지고 서남쪽이 열려 있는 형국인데, 지대가 높고 산의 골이 깊어 수해나 한해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형이다.
갈월마을은 능원에 세거해 온 이석형 선생의 후손인 이삼로(李三老)가 입향한 뒤 다섯 형제를 두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과거에는 90여 호 가운데 60여 호를 연안이씨가 차지하고 있었으나 오늘날은 80여 호 가운데 30여 호가 연안이씨들이다.
1. 입지와 구조
모현읍 일대에 연안이씨가 이거(移居)하여 정착한 것은 15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현재 용인에서 연안이씨가 주로 세거하는 곳은 모현읍의 능원리와 동림리, 갈담리, 초부리 일대이다. 특히 갈담리의 자연마을인 갈월마을은 전통적인 마을 경관뿐만 아니라 동족촌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갈월마을은 노고봉(老姑峰)[573m]과 정광산(正光山)[563m]을 잇는 산맥에서 서쪽의 경안천을 향해 열려 있는 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가 비교적 넓고 평탄하여 큰 규모의 마을이 들어설 정도로 공간이 충분한데다 상당한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농경지도 포용하고 있다.
또한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계류를 통해 식수와 농업용수의 획득도 용이하다. 마을에 생활용수 및 관계수를 공급하는 계류인 갈담천은 동서 방향으로 마을을 통과한 후 경안천으로 유입된다. 1960년대 말에는 마을 위쪽 골짜기에 갈월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있다.
갈월마을은 다시 아랫말과 윗말로 나누어진다. 마을 가운데, 즉 윗말 초입에는 느티나무 노거수로 이루어진 숲이 갈담천변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숲은 다목적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갈담천을 따라 숲이 조성되어 풍수적으로 수구막이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마을 주민들의 휴식 및 집회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숲 앞에는 계류를 이용한 공동빨래터와 소규모 공동목욕탕이 있었는데, 현재는 마을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내부로 들어가면 좁은 골목길들이 얽혀 있는 사이사이로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특히 가옥들을 이어주는 샛길은 길 입구에서 보면 가옥의 담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길로 보이지만 끝까지 들어가면 길이 꺾이면서 대문과 연결되는 이른바 고샅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을이 다소 변형되기는 했지만 용인 지역에서 가장 전통적인 마을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보존의 가치가 충분하다.
2. 갈월마을의 오늘
장사래고개로 불리는 고개에서 바라보면 멀리 북쪽으로 아파트단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은 날은 광주벌까지 한눈에 보이던 곳인데, 멀고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아파트가 숲을 이루어 이제는 서울 같은 도시의 원경을 바로 가까이서 보는 것 같다. 하기는 용인 쪽으로도 건물이나 공장에 막혀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니 개발과 발전이라는 말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장사래고개는 용인과 광주를 잇는 국도 45호선에 위치한 유일한 고개이자,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조에 등장하는 고개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와 후기의 문신으로 활동했던 남구만은 숙종 때 벼슬에서 물러난 뒤 갈월마을 서쪽에 있는 파담마을로 내려와 살았는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이때 지은 시조로 보인다. 장사래라는 말은 긴 사래라는 뜻이니, 예부터 농사를 짓기에는 좋은 고장이었던 것 같다.
장사래고개에서 동쪽으로 능선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갈월마을이 나온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양쪽에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는 오솔길이었는데 솔숲은 모두 밭으로 개간되고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창고나 공장건물이 없었으나 지금은 하나 둘씩 늘어나 몇 백 년을 내려오며 간직해 오던 아름다운 모습을 좀먹고 있다는 느낌이다. 갈월마을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백색의 2층 건물은 조각가인 진철문의 살림집 겸 작업장이다. 마당에 여기저기 창작 중인 작품들이 있는 이 집은 마을과는 조금 이질적인 모습으로 와닿는다.
갈월마을로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돌담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가면 거의 모든 골목과 집집마다 돌담이 둘러 있다. 이끼가 파랗게 끼어 있는 담 위에는 담쟁이와 호박넝쿨이 사이좋게 얽혀 있고, 울안에는 감나무가 몇 그루씩 집들을 호위하고 있다.
가을이 되어 감들이 빨갛게 익으면 마을은 그야말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까치감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초겨울이 되면 기와지붕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 또다른 세상이 될 터이다. 살림집들도 최근에 지어진 몇 채를 제외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슬레이트나 시멘트 기와를 올린 집들의 지붕을 내리고 이엉을 올리면 바로 민속마을로 바뀔 것 같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기와집은 인동댁으로 불린다. 인동댁 위편에는 도사댁, 회관 아래편에는 면장댁 등 커다란 기와집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주택의 크기나 공간 배치 등이 옛 양반가의 모습 그대로이다. 용인댁이니 수원댁이니 하고 부르던 택호(宅號) 또한 거의 모든 집에 남아 있다. 인동댁 뒤꼍에는 사당이 있는데, 용인 지역 민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당이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색도 바래고 건물도 기울었으나 마을을 울리던 집안의 가풍이 그대로 되살아나오는 것 같다.
갈월마을의 연안이씨들은, 입향조인 이삼로 선생을 기준으로 헤아리면 높게는 8대손에서 9대, 10대, 11대로 이어지고 있다. 항령 가운데 ○희(熙)나 ○배(培)가 주로 많은데, ○배(培)자 항렬을 기준으로 하면 갈월마을의 연안이씨들은 모두 20촌 이내가 된다. 이는 동족촌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마을 뒤로는 높이 솟은 정광산과 노고봉이 있는데,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 이름 대신 ‘큰산’이라고들 불렀다. 산하가 움트는 초봄의 산나물에서 시작하여 여름과 가을의 산과실, 그리고 가을·겨울의 땔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산이기에 더욱 어울리는 이름 같기도 하다.
그 ‘큰산’에서 갈월마을을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밀물처럼 몰려드는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그래도 동족마을이었기에 고향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지켜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에게 물질적 풍요보다 문화적인 여유를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갈월마을을 비롯한 더 많은 동족촌들이 부활되고 유지되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