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44 |
---|---|
한자 | 漾碧亭記 |
영어음역 | Yangbyeokjeonggi |
영어의미역 | Anecdotes of Yangbyeokjeong Pavili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순석 |
성격 | 기문(記文) |
---|---|
작가 | 홍귀달(洪貴達) |
창작연도/발표연도 | 1497년(연산 3) |
[정의]
1497년(연산 3) 홍귀달이 지은 용인현에 있었던 양벽정의 기문.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용인현」 ‘누정(樓亭)’에 전하는 작품으로, 용인현감 김우(金祐)의 부탁으로 홍귀달(洪貴達)[1438~1504]이 지어준 기문(記文)이다.
[내용]
조선 성종 때 김우(金祐)가 용인현감으로 부임하여 잘 다스렸음을 칭송하고, 객헌(客軒) 동쪽에 있던 정자 터에 새로 정자를 짓고 ‘양벽정(漾碧亭)’이라 하였는데, 기문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김우가 부탁하여 기문을 짓게 된 사실을 서술하였다.
“고을에 못과 누대와 정자의 승경이 정치와 무슨 관계가 있으랴마는, 한 세상 태평스런 기상을 보려면, 여기라야 징험할 수 있나니 어찌 우연할 뿐이겠는가. 용인은 남북으로 몰려드는 요충 지대에 해당되므로 경기 여러 고을 중에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이뿐이다. …(중략)… 객헌 동쪽에 예전에는 조그만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으나, 동쪽 담이 객사에서 너무 가까워서 마당을 빼고 나면 넓이가 1무(畝)도 못되었다. 손이 와도 좁은 마당을 답답하게 여겨서 술상을 물리면 곧 일어나 나갔고, 잠깐 머물지도 않았다. 이렇다면, 비록 사방 백성이 들에서 화합한다 하여도, 어디에서 태평한 기상을 볼 수 있으랴.
이에 너무 가깝던 담을 물리고 땅을 다져서 넓히니, 그 안에서 말을 달릴 만하였다.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산골 샘물을 끌어서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담을 뚫어서 마당 안의 못에 흘러들게 하였다. 못 깊이는 한 길쯤이고, 세로는 두어 발, 가로는 세로의 곱절이며, 물이 맑아서 옥 같았다. 마당에는 고목이 띠엄띠엄 따로 서서 땅에 서늘한 그늘이 졌는데, 매우 사랑스러웠다. …(후략).”
(邑而有池臺亭榭之勝 何關於政治 而要觀一世太平之象者 於是乎徵焉 豈偶然而已哉 龍仁 當南北走集之衝 畿縣之崔難治者此耳…(중략)…客軒東 舊有小亭 今無遺址存 東墻迫近客舍 庭除之廣不能畝 客至病其阨 杯盤撤 輒起去 不小留焉 是則雖四民和於野 於何見大平象乎 於是 退其迫近 夷地而廣之 其中可容馳馬 引山泉之北來者 導而東之 穴其墻入其流 池于其內 深可一身許 縱數丈 橫倍蓰 水淸碧玉如也 古木蕭蕭 離立庭際 落地有凉陰 甚可愛也 …(후략))
[의의와 평가]
이 기문을 통하여 조선 초기에 용인현은 교통의 요새지로 빈객의 왕래가 번다하여 경기 여러 고을 중에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웠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미 소실된 양벽정의 위치와 규모, 빼어난 경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남쪽 지방에서 상경하는 자에게 “용인의 연못을 보았는가?” 물을 정도였다고 하며, 3칸의 규모로 연못 위에 지었다는 사실을 이 기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세조 때 지은 신정(新亭)이 소실되자 다시 짓고 양벽정이라 이름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