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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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仁新亭記 |
영어음역 | Yongin Sinjeonggi |
영어의미역 | Anecdotes of Sinjeong Pavili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순석 |
성격 | 기문(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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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수녕(金壽寧) |
창작연도/발표연도 | 1460년(세조 6) |
[정의]
1460년(세조 6) 김수녕이 용인현의 한 정자의 유래를 적은 기문.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용인현」 ‘누정(樓亭)’에 기록되어 전한다. 용인현감 박거명(朴居明)이 치소(治所)에 정자를 지은 뒤 김수녕(金壽寧)[1436~1473]에게 부탁하여 받은 기문(記文)이다.
[내용]
박거명이 용인현감으로 부임하여 행한 선정을 칭송하면서, 새로 지은 정자의 이름을 ‘신정(新亭)’이라고 지은 데 대한 설명을 적은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인(龍仁)은 작은 고을이나 서울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밤낮 없이 폭주하는 대소의 빈려(賓旅)가 이곳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개 남·북의 인후(咽喉)라 하겠다. 옛 관원(館院)이 적어서 겨우 하룻밤을 지낼 만하며, 한더위를 당하면 막히고 답답하여 손이 오더라도 회포를 풀 길이 없어 번열(煩熱)에 허덕이니, 병으로 여긴 지가 오래였다. 천순(天順) 4년 겨울에 박군(朴君)이 와서 이 고을을 맡게 되자, 과세(課稅)에 너그럽고 정사에 민첩하여 온갖 폐단이 다 없어지니, 서리(胥吏)는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리워하였다. 하루는 군이 서리와 상의하기를, “내가 재목을 모아 정자를 지어 손님의 납량(納凉)할 곳을 만들고자 하는데 옳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이미 군의 정사를 덕으로 여기는 처지라 모두 하는 말이, “원컨대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장인(匠人)은 정신을 가다듬고 역사하는 자는 힘을 부지런히 하여, 새벽과 밤으로 일을 서둘러서 한 달 안에 낙성을 고하게 되었다. 시작할 때에 백성은 정자를 짓는 줄도 몰랐다가 완성된 뒤에 바라보며 말하기를, “우리 원님은 옛날의 이른바 신명(神明)이 아닌가. 정자를 지었는데도 어찌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을까.” 하며, 서로 우러러 보고 감탄하며 그 새로 지은 것을 경축하였다. 요즘 세상의 수령들을 보면 도취한 꿈속에서 날을 보내며, 관청을 여관집 보듯이 하여 기울어진 뒤에야 기둥을 바꾸고 비가 샌 뒤에야 수선하며, 심한 자는 기와 하나도 갈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나는 백성을 아껴서 그렇다.” 하며, 풀 한 포기도 제거하지 아니하고서, “내 뜰에는 송사가 없어서 그렇다.” 하니, 관사의 퇴락은 항상 이러한 무리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어찌 능히 일에 분발하여 처음부터 튼튼히 하는 자가 있으며, 또 어찌 능히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게 하고 이와 같이 짓는 자가 있으리요. 내가 일찍이 남쪽에 노닐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용인(龍仁)을 지나는데, 박군이 나에게 붓을 주며 기(記)를 청하므로 나는 이미 이와 같이 졸하게 적었었다. 군은 말하기를, “정자가 기(記)를 얻었으니 다행이나, 명칭이 아직 없으니 어찌하랴.”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명칭이 있어야 의당 옳겠지만, 명칭이 없더라도 또한 불가할 것은 없다. 용인 고을에 그대 같은 원이 없었으면 정자가 세워질 까닭이 없고, 정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면 명칭이 어디서 나오리요. 명칭이 없는 것으로써 명칭을 하는 것도 역시 좋은 명칭이 아닌가 싶다.” 하였다. 군이 나에게 간청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므로 인하여 용인 백성이 우러러보며 새로 지어진 것을 경축하는 뜻을 채택하여 이름을 신정(新亭)이라 하자고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이르지 않았던가. “신(新)이라 이른 것은 옛날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또한 처음부터 군자가 중히 여기는 의(義)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박군의 이름은 거명(居明)이요, 자는 회부(晦父)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龍小邑也 以其接於王都也 故凡大小賓旅 日夜輻湊 莫不因是 盖南北之喉也 舊舘院小 止可一宿 而至於盛暑 則湮欝不開 客至無以曠懷 熱鑠煩敲 久已病矣. 天順四年冬 朴君來守是邑 賦政寬敏 百弊畢袪 吏民懷畏. 一日 君謀於吏曰 吾欲鳩材構亭 爲賓開納涼之地 不知可乎 夫旣德君之政 則咸曰願盡力 於是 工者勵 役者勤 晨夜奏功 不月而告成 其始也 民不知亭焉。旣成則望之曰 吾守得未古之所謂神明者乎 亭何使我不與知也 相與瞻仰齎咨 慶其新焉 今觀世之官守者 醉夢玩愒 視官府如蘧廬 傾而後柱之 漏而後塞之 甚者一瓦不易而曰 吾能字民也 一草不除而曰 吾庭無訟也 廨舍之圮敗 恒由此輩 豈有能奮事謀始者 又豈有能使民不與知 以就於此者 余嘗南遊 承宣召 過龍 朴君授余筆請記 余旣拙道之 君曰 亭得記多矣 奈無名何 余曰 有名固可無名亦無不可 使龍而無君 亭不可作 亭不作則名安從出 吾以無名名之 亦名之善也 君強余愈勤 因採龍民瞻仰慶新之意 請姑名之曰 新亭 傳不云乎 言新者有故也 亦未始不有君子重之之義云 朴君 名居明 字晦父 密山人)
[의의와 평가]
이 기문을 통하여 조선 초기에 용인현은 교통의 요새지로 빈객의 왕래가 번다하였으며, 치소 어딘 가에 ‘신정’이라는 정자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용인현감 박거명의 선치에 대한 사실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용인현 치소의 자취는 소실되어 위치만 짐작할 뿐인데, 이 작품을 통하여 당시 용인현의 정황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