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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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回甲禮 |
영어음역 | Hoegamnye |
영어의미역 | Banquet on One's 60th Birthday |
이칭/별칭 | 환갑(還甲),화갑(華甲),주갑(周甲),갑년(甲年),환력(還曆),환갑(換甲)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시덕 |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만 60세 되는 생일을 축하하는 의례.
[개설]
회갑(回甲)은 우리나라의 나이 계산법에 의하면 61세에 해당하는 해로서, 60갑자가 다시 돌아온다는 뜻에서 회갑이라 하였다. 환갑(還甲)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60갑자를 새로 바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외에 주갑(周甲), 갑년(甲年), 환력(還曆), 환갑(換甲), 화갑(華甲)이라고도 하였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6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회갑을 맞이하는 일은 일생의 큰 경사나 다름 없어 자손들이 잔치를 베풀고 축하하는 관습이 생긴 듯하다.
[연원 및 변천]
회갑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충렬왕 22년조(1296)로, “이때 왕의 나이 61세였는데, 술자(術者)가 환갑은 재앙이 많은 해이니 미리 신수를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환갑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61세 생일날에 이르면 회갑이라 하여 잔치를 베풀고 장수를 축하하는 의식을 행한다. 이날은 친척과 친구들이 모여 술잔을 올리면서 장수를 축하한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육순에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시대부터 회갑과 관련한 의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의례가 행해져 『가례(家禮)』나 『사례편람(四禮便覽)』과 같은 예서에는 회갑에 대한 언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말기 심석제(心石濟)의 문집인 『사례축식(四禮祝式)』에 회갑례에 대한 내용이 있고, 체계적인 의례 수행 방법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회갑은 고려 중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조선 중기 이후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회갑날 부모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푸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효도를 다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요즘에는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60세보다는 70세나 80세의 생일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절차]
회갑날 아침이 되면 회갑을 맞은 당자는 사당에 회갑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고하는 고유를 행하고, 손님들이 오기 전에 반드시 미역국이 있는 성찬을 차려 아침식사를 한다. 그러고 나서 회갑상을 차리는데, 주로 대청에 차린다. 회갑상 뒤쪽에는 병풍을 치고 그 앞에 회갑을 맞은 당자 부부가 앉는다.
회갑상으로는 교자상을 쓰며, 안쪽에는 각종 음식을 차리고, 하객들이 보는 바깥쪽에는 장식음식, 곧 밤·대추·잣·호두·곶감·과자·강정·다식·약과·훈춘 등을 고임으로 차린다. 고임음식은 높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보통 한 자 정도 높이로 차린다.
이렇게 음식을 높이 괴는 것을 고배(高排)나 고임새라고도 하는데, 숙달된 솜씨가 필요하므로 남자들이 주로 하였고, 잘하는 사람은 이집 저집 잔치 때마다 불려다니기도 하였다. 이렇게 음식을 높이 쌓은 교자상은 망상(望床)이라고도 했다. 바라보기만 하는 상이라고 한 데서 나온 명칭이다. 고임음식 사이나 옆에는 문어로 오려 낸 국화와 매, 용, 거북, 학 등 장수를 상징하는 장식을 한다. 환갑상 앞쪽에는 헌주상(獻酒床)을 놓는다.
모든 준비가 되면 형편에 따라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울리는데, 요즘에는 식당의 밴드를 이용한다. 먼저 장남 부부가 회갑상 앞으로 가서 부모님께 술을 올리고 큰 절을 한다. 이를 헌수(獻壽)라고 한다. 다음에는 자손들이 연령과 항렬순으로 각각 헌수를 한다. 술을 올릴 때는 헌주가나 권주가를 부른다. 직계 자손의 헌주가 끝나면 친척들 역시 연령과 항렬순으로 헌주를 한다. 또한 친분 관계에 있는 타성(他姓)들로부터도 헌주를 받는다.
환갑을 맞은 당자의 부모가 생존해 있을 경우 당자는 색동옷을 입고 부모에게 절을 하고, 어린애처럼 기어다니며 재롱을 떨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늙은 부모를 위로하는 의미도 있지만, 하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어 잔치 분위기를 돋우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잔칫집에서는 떡과 술, 과일과 특별 음식으로 하객들을 대접한다. 회갑잔치는 보통 하루로 끝내지만 재력이 있는 집에서는 며칠씩 하는 경우도 있다.
기흥구 서천동에 사는 K씨는 1973년에 회갑을 맞았다. 회갑잔치는 자식들이 알아서 약 한 달 전에 생일을 넘기지 않도록 날을 잡고 초청자 명단을 작성하는 등 준비하였다. K씨는 자진해서 경비의 일부를 부담하였다. 음식은 잔치 하루 전날 마을의 부인들이 모여서 장만했고, 남자들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고임을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과일을 고이는 등 밤늦게까지 큰상에 차릴 고배를 준비했다. 상이나 병풍, 멍석 등의 집기는 마을회관에 비치해 둔 것을 사용하였다.
잔치는 당일 10시쯤부터 시작되었다. 교자상 두 개를 옆으로 이어놓고 K씨의 형제 내외가 나란히 앉았다. 맨 앞줄에 고배를 마련하고, 당자인 K씨의 앞쪽에는 입맷상을 마련하였다. 음식은 전통에 맞게 차렸다. 잔치는 이장의 사회로 격식을 차려 진행되었는데, 자손들이 헌수할 때 기생 한 명이 옆에서 권주가를 불렀다.
헌수 순서는 장남 부부, 장녀 부부, 차녀 부부, 미혼의 차남과 삼녀가 함께 올렸다. 다음으로 손자 손녀에 이어 장조카가 차례대로 헌수를 하였다. 헌수 후에는 바로 여흥으로 들어갔는데, 맏사위가 갑주(甲主) 내외를 차례로 등에 업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에 사는 C씨는 1986년에 회갑잔치를 하였다. 교자상을 차릴 때는 마을 사람들 중 고임을 잘하는 사람이 와서 하고, 음식은 마을의 부인들이 도와주었다. 잔치 당일 고배상을 앞에 두고 회갑을 맞은 당자 부부가 가운데에 앉고, 좌우로 형제 부부가 앉았다. 기생을 부르지 않아서 헌수를 할 때 노래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헌수하는 순서는 예법대로 하였다.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에 사는 K씨의 회갑잔치는 1994년에 있었는데, 마을에서 하는 전래의 격식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예식장에서 하였다. 전문 예식장에서 하였기 때문에 고임새 등의 음식 준비는 예식장에서 하였다. 잔치 절차는 예식장의 식순에 따랐는데, 개식사에 따라 환갑을 맞은 당자가 입장하여 자리에 앉자 사회자가 당자의 약력을 소개하고, 자손들을 일일이 소개하였다. 식장의 도우미가 나와서 헌수를 도와주었는데, 이때 절값이라고 하여 돈봉투를 상에 놓게 하였다. 노래반주기에 맞추어 흥겨운 잔치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