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219 |
---|---|
한자 | 李縡肖像 |
영어음역 | Lee jae Chosang |
영어의미역 | Potrait of Lee jae |
이칭/별칭 | 이재 초상화,이재 영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은선 |
[정의]
경기도 용인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인 이재의 초상화.
[개설]
이재 초상은 초상화의 전신(傳神)기법을 매우 잘 포착한 뛰어난 그림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특히 관복이 아닌 일반 편복을 입고 있는 초상화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안면과 신체의 비율이 적절하여 능숙한 화가의 솜씨가 엿보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재(李縡)[1680~1746]는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에 나아간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서 예학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형태 및 구성]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과 전신칠분면(全身七分面)의 복부 이하까지 그려진 반신상이다. 머리에는 흑색 복건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복부 아래에서 공수하고 있어 유학자의 학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화면에 반신상이 모두 표현되지 않고 하단부가 잘려진 상태이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구도를 지니고 있다.
복건은 모정(帽丁)이 다소 높고 머리 뒤로 후건을 길게 드리웠다. 심의는 원래 유학자들의 예복인데, 옅은 미색을 띠고 깃과 소맷부리에 검정색 연(聯)을 둘렀다. 허리띠에도 테두리에 검정색의 연을 덧대었으며, 오채조(五彩絛)까지 완벽하게 갖추었다.
안면 표현은 강한 전신(傳神)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다. 옅은 갈색으로 윤곽과 이목구비를 살짝 잡고, 옅고 짙은 선염을 골고루 사용하여 강한 입체감과 정교한 음영을 표현하였다. 특히 강렬한 눈동자와 하얗게 새어 버린 긴 수염은 심지가 굳은 유학자의 풍모를 잘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얼굴의 세밀하고 능숙한 음영법은 18세기보다 19세기의 필법에 보다 가깝기 때문에 이 작품의 제작 시기를 늦추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정교한 얼굴 묘사에 비해 신체 표현은 유려한 필선으로 대비된다.
연갈색의 다소 두꺼운 필선으로 구겨진 옷주름과 어깨선의 자연스런 표현이, 당대 최고의 화원 작품으로 보여진다. 유려한 옷주름의 선을 따라 부분적으로 엷게 선염하였으며, 품위있고 격식있는 유학자의 풍모를 잘 전달하고 있다. 흑백의 대비가 강렬한 단조로운 분위기에 오채조(五彩絛)를 강조하여 전체적으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징]
이재 초상은 조선시대 사대부를 그린 초상화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제작 시기와 작품명과 관련하여 이견(異見)이 많은데, 특히 안면 묘사법 등으로 보아 이재의 몰년 당시의 작품으로 추정하기는 어려워, 후대에 그려진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재의 초상화와 이재의 손자인 이채(李采) 초상화는 관모나 자세의 차이를 빼면 용모가 매우 흡사하여 이에 대한 이견이 존재한다. 즉 일본 학자 구마가이[熊谷宣夫]는 조선 말기 어용화가인 채용신(蔡龍臣)의 후손이 진술한 것을 토대로, 채용신이 이재의 사후에 손자 이채(李采)의 초상화를 토대로 이재 초상을 그린 것으로 보고 있어 흥미롭다.
그러나 이재 초상의 화면에 적힌 찬문 속에 이채 초상을 제작할 당시 이재의 초상화가 전해 오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어 정확한 실정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재 생존 시에 그려졌거나 몰년 즈음에 그려진 작품으로는 보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화풍이나 재질, 보존 상태가 뛰어나 일찍부터 학계와 화단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특히 얼굴의 정교한 필법과 의습의 간략한 필선을 대비, 조화시켜 완성도가 높은 수작이다. 뛰어난 기교와 생동감있는 필법으로 미루어 당대 최고의 화원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