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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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顯謨 |
영어음역 | Han Hyeonmo |
이칭/별칭 | 회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광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회이(晦而). 아버지는 성균관진사로서 생애를 마치고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한사범(韓師范)이다. 조부는 한배의(韓配義), 증조부는 한성우(韓聖佑), 외조부는 유명흥(兪命興), 처부는 심봉휘(沈鳳輝), 아우는 한익모(韓翼謨)이다.
[활동사항]
1723년(경종 3)에 증광시(增廣試)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한 뒤 1725년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728년 이후 정언·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를 차례로 거친 다음 영남안렴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강원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울진현감 이식명이 본도에 유배 중인 민천효를 매우 우대하고 있음을 보고하여 파직·하옥되었다. 또한 양역(良役)의 폐해가 심함을 보고하였다.
특히 폐해가 많은 안협현감 신의집, 정선군수 송필환, 평창군수 최창억, 낭선현감 이도재 등은 파직하도록 하였다. 철원부사 민사연, 고성군수 박필기, 전 안협현감 홍중기 등은 선정을 베푼 수령으로 포상하도록 할 것을 진언하였다. 1732년 경성판관으로 있다가 돌아와 이듬해 응교·집의를 거쳐 1735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승지·대사성·예조참의·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45년 강화유수가 되어 군기를 수리하고 강화성을 개축하는 등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1747년 대사헌에 올랐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유고집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처음 경기도 의왕시에 있었으나 1982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창리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