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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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來吉 |
영어음역 | Choe Naegil |
이칭/별칭 | 자대,이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재광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대(子大), 호는 이재(頤齋). 증조부는 최업(崔嶪), 조부는 최수준(崔秀俊), 외조부는 유영입(柳永立)이고, 아버지는 부사(府使) 최기남(崔起南)이다. 동생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인 최명길(崔鳴吉)이고, 부인은 익성군(益城君) 이형령(李亨齡)의 딸이다.
[활동사항]
최내길(崔來吉)[1583~1649]은 1606년(선조 3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곧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간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직강(直講)·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 때 뒤늦게 홍제원(弘濟院)으로 달려가 아우 최명길, 김류(金瑬) 등 문신·무신 200여 명과 함께 창의문(彰義門)을 넘어가 궁성을 지킨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충청남도 공주로 호종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이후 한성부좌우윤(漢城府左右尹), 형조참판(刑曹參判), 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지냈으며, 1630년(인조 8)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부임하였다.
이어 청주목사(淸州牧使)와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1645년(인조 23)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자되어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배수하였다. 1647년(인조 25)에 경기감사(京畿監司)가 되고, 1648년(인조 26)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1649년(인조 27)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