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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965
한자 鄭文炯
영어음역 Jeong Munhyeong
이칭/별칭 명숙(明叔),야수(野叟),양경(良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427년연표보기
몰년 1501년연표보기
본관 봉화(奉化)
대표관직 우의정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명숙(明叔), 호는 야수(野叟)이다.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의 증손 정속(鄭束)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447년(세종 29)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정과로 합격,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감찰을 거쳐 1453년(단종 1) 예조좌랑으로 있었으나 궐내에 기생을 불러들여 가무음주한 죄로 장형(杖刑)을 받았다. 1455년(세조 1) 교리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사간을 거쳐 예조정랑으로 가례색도감낭청(嘉禮色都監郞廳)을 겸직하고 이어 사인(舍人) 재직시에 또 기생을 불러들여 음주한 죄로 장형을 받았다.

1464년(세조 10)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진주에 살던 소훈윤씨(昭訓尹氏)의 어머니 병환을 잘 보살피지 않았다는 죄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파직되었다. 1466년 함길도 절도사, 변정원(辨定院)[예장원]의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2년 병조참판·평안도관찰사·행강원도관찰사(1486), 1488년에는 형조판서를 거쳐 1489년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조판서·호조판서를 거쳐 1492년 우찬성에 올랐다. 우찬성이 되고 난 다음해 용인으로 분황(焚黃)하러 갔는데, 이로 볼 때 경기도 용인 지역에 조상의 묘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겸직하였다. 그런데 이조판서 재직시(1490) 정문형의 아들 정숙성(鄭叔猩)가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제수되자,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상피제(相避制)를 어긴다 하여 논란이 일어났으나 결국 성종의 비호로 유야무야되었다.

1495년 판중추부사, 1496년(연산군 2) 우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이 해 용렬하고 탐학한 재상이라는 탄핵을 받고 영중추부사로 체직, 영경연사를 겸직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조정대신들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을 대역죄인으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할 것을 주장했다.

[묘소]

묘는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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