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7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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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沈之漢 |
영어음역 | Sim Jih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영의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장(子章), 호는 창주(滄洲). 심탁(沈倬)의 아들이며, 정엽(鄭曄)의 문인이다.
[활동사항]
심지한은 1618년(광해군 10) 동학유생(東學儒生)으로 조경기(趙慶起) 등 8인과 함께 폐모론을 주도하는 이위경(李偉卿)·정조(鄭造)·윤인(尹認) 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상소하였다. 이 일로 아버지 심탁과 함께 가산이 적몰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여 횡성에 들어가 숨어 지냈다.
인조반정으로 이후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9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를 지내고, 뒤에 한림에 들어갔다. 그 뒤 사서·정언·부수찬·지평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의 병자호란 전에 청나라와 절교하고 자강책(自强策)을 강구하여 대비하자고 주장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태인현감과 종묘령(宗廟令)을 거쳐 1640년 평창군수가 되었으나, 태인현감 때 왕명 사신을 쫓아버렸다는 혐의를 입어 체직되었다.
평안도사로 있을 때 기민을 잘 구제하고, 물 관리를 잘하여 가뭄에 대비하였다고 알려져 인조에게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647년 다시 부교리·교리·겸찬독(兼贊讀) 등의 요직을 거처, 1650년(효종 1)에 응교로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의로 억울하게 귀양간 유계(兪棨)의 무죄를 상소하였다. 1653년 홍처후(洪處厚)와 함께 「무일편(無逸篇)」과 「칠월편(七月篇)」을 베껴 병풍으로 만들어 왕에게 바쳐 효종의 총애를 입었다. 이어 승지가 되었고, 호조·병조·공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연안부사로 있다가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가 죽었다.
[학문과 사상]
『주역』 등을 즐겼으며 『시전』·『서전』·『대학』·『주례』의 골자를 따서 『사도(四圖)』를 편찬하여 효종에게 바쳐 상으로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창주집』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권상하(權尙夏)가 쓴 묘비는 실전하고, 지금의 것은 새로 건립한 것이다. 원래 묘소는 광주 선영에 있었으나, 이후 용인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