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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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斗鎬 |
영어음역 | Min Du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양촌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홍영의 |
[정의]
조선 말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현감 민치서(閔致敍)의 아들이며, 민영준(閔泳駿)의 아버지이다.
[활동사항]
민두호는 1880년(고종 17)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지냈으며, 1882년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재임하였다. 1886년에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춘천부사에 재임하였으며 독련어사(督鍊御史)의 역을 맡기도 하였다. 행정구역이 개편된 뒤 춘천부에 유수(留守)를 두게 되자, 춘천부사에서 그대로 춘천부유수가 되어 1892년까지 재임하였다.
1893년 5월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12월 다시 춘천부유수로 임명되었다. 춘천부유수 재임 때 동학농민전쟁 발발에 대한 문책으로 조정의 민씨 척족들이 해직되자 그도 역시 물러났다. 그러나 1900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에 임명되고 칙임관1등에 서임되었다. 1902년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민두호(閔斗鎬)는 민씨 척족들이 정계의 거두자리에 올라서자 권위를 남용하여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젊었을 때 살림이 곤란하여 수원에서 자리장사를 하였다는데, 아들 민영준이 출세한 뒤로 아들보다 더 심하게 돈 모으기에 전념하여 ‘민쇠갈구리[閔鐵鉤]’라 불렸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족(閔族)에 세 도둑이 있는데, 경성에는 민영주(閔泳柱)요, 관동에는 민두호(閔斗鎬), 영남에는 민형식(閔炯植)이라 할 정도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양촌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