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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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若恒 |
영어음역 | Kim Yakhang |
이칭/별칭 | 구경,척약재,광산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일산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은숙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구경(久卿), 호는 척약재(惕若齋). 아버지는 대광(大匡) 김정(金鼎)이다. 아들은 김처(金處)와 김허(金虛)이다. 아들 김처는 아버지가 명나라에서 죽자 미쳤으며, 김허는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활동사항]
1371년(공민왕 20)에 실시된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로로 나섰다. 이후 전교주부(典敎注簿)가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예의총랑(禮儀摠郞)에 이르렀다. 공양왕 때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가 말을 잘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지곡주사(知谷州事)로 좌천당하였다.
얼마 후 강원도염문계점사(江原道廉問計點使)로 나아갔으며, 이어 집의(執義)에 올랐다. 당시에는 정몽주·이색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혁파와 이성계·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한 강경개혁파 간의 대립이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나 시류에 크게 휩쓸리지 않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에 임명되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청한 문서를 기초한 책임자가 되었다. 1395년(태조 4)에는 명나라에 들어가 억류된 사절단 유순(柳珣) 등을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396년(태조 5)에 명나라에 보낸 표전(表箋)의 내용이 불공스럽다는 이유로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과 함께 명나라에 불려가 억류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났으며 그곳에서 태조로부터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후에 다른 일로 다시 양자강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일산리에 유허지(遺墟址)가 있으며, 유허비와 단(壇)이 전하고 있다. 본래 서울시 서초동에 있었으나 1970년대 도시개발로 인해 현위치로 옮겼다.
[상훈과 추모]
태종이 즉위한 뒤 1401년에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추증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