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98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activis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동석

[정의]

1895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항일 투쟁을 한 사람.

[개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난 시기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함양 지역 내에서 의병운동·독립만세운동 등에 참여하여 정부로부터 공훈을 받았던 사람은 총 29명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의하면, 함양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투쟁은 의병 활동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의병 운동]

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소백산맥 자락에 있으며, 북으로는 덕유산[1,614m]과 남으로는 지리산[1,915 m]과 인접한 험난한 산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육십령을 포함해 백전면 매치마을함양읍 서쪽 팔령마을을 지나 전라북도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기부터 함양 지역에서는 활발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함양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으로는 안의 출신의 노응규(盧應奎)문태서(文泰瑞)를 들 수 있다. 노응규는 1896년 1월에 안의로 돌아와서 승려였던 서재기(徐再起)와 기의(起義)하여 진주성을 공략하였다. 그 후로 김해·의령 등지로 진출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고, 1907년 1월에 서울 진공 작전 계획이 누설되면서 체포되었다. 문태서 역시 안의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에서 최익현을 만나 의병 기의에 대해 논의하고, 1906년에 안의에서 동지 60여 명과 기의하였다. 문태서는 1911년에 체포될 때까지 충청북도 옥천의 이원역 폭파사건을 비롯하여 160여 차례 전투를 치렀다. 문태서의 용맹함은 ‘덕유산 호랑이’라는 별명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 함양 덕유산 일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외에도 권석도(權錫燾)는 김동신(金東臣)의 의병단에 참가하였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함양·하동·구례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문태서 의병대와 제휴하여 활동하였던 박민기(朴岷箕), 오일선 의병대에서 활약하였던 박수기(朴洙箕)박화기(朴華箕), 노응규와 함께 거병하였던 서재기, 안의와 거창에서 전승을 거두었던 전성범(全聖範), 1908년 박동의 의병진에 참여하였던 김순오(金順吾)·김찬언(金贊彦)·석상룡(石祥龍)·이창학(李昌鶴)·이봉두(李鳳斗)·이안옥(李安玉) 등이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함양 지역에서 의병활동에 참여한 공적으로,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은 사람은 14명이다. 이들 중에는 안의 출신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데, 인근 거창의 곽종석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함양군에서는 ‘문태서 의병장 생가[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1027·1028 일대]’와 ‘노응규 생가[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232]’를 복원하여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정신을 기리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독립 만세 운동]

1919년의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였던 조선 민중의 대대적인 항일 독립 운동이었다. 당시 함양 지역에서도 함양과 안의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함양에서 첫 만세운동은 3월 28일에 발생하였다. 당시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노경식(盧璟植) 등이 만세운동을 밀의하고,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가지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일본 헌병들의 강제 진압으로 함양장터 3·1만세운동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였다.

이에 병곡면 연덕리김한익(金漢益)이 재차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1919년 4월 2일에 3,000여 군중의 호응 속에 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김한익이 체포되자 하승현(河升鉉)은 앞으로 나서 ‘검거한 애국인사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였다. 하승현은 헌병분견소 내로 진입하려다 일본 헌병이 발사한 총탄에 순국하였고, 아버지 하재연(河在衍)과 작은아버지 하재익(河在翼)도 모두 총상을 입었다. 하승현과 함께 분견소 진입을 시도하였던 윤영하(尹榮夏)도 총상을 입었다.

안의면에서도 전병창(全炳昌)·김채호(金采鎬)·최석룡(崔碩龍) 등과 1919년 3월 31일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밀의하였다. 안의읍 장날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전병창을 포함한 주도자 5명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분노한 군중들은 거창에서 지원 나온 거창수비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안의김동호(金東鎬)는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함양 지역에서 3·1운동 때 9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하였으며, 20명이 투옥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공적으로 해방 후에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은 사람은 7명이다.

[기타 항일 운동]

의병운동이나 독립만세운동 외에도 함양 지역민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권도용(權道溶)은 1913년에 『경남일보』의 주필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권도용은 함양읍안의면에서 만세운동이 끝난 뒤인 1919년 6월까지도 「조선독립선언문」·「조선독립가」 등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또한 이갑수(李甲銖)는 1920년에 『대한민국임시헌법』과 『신한별보』를 배포하였다. 승려였던 백초월(白初月)은 비밀단체인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를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집하였고,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여 항일운동도 하였다.

이 외에도 함양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로는 1925년에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였던 방한상(方漢相), 1922년에 대구고보의 행휴운동을 주도하였던 하종진(河鍾璡), 1923년에 진주공립농업학교에서 비밀결사인 ‘동무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던 이정돌(李正乭), 1934년에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준비위원이었던 양성호(梁成灝), 1942년에 일본대학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하였던 이장우(李章雨) 등이 있다. 함양 지역 독립운동에서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였던 백용성도 주목된다. 백용성은 백전면 백운산 중턱에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여 선농일치의 불교를 실현하고자 하였고, 화과원을 통해 독립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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