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813
한자 金漢益
영어공식명칭 Kim Han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9월 13일연표보기 - 김한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김한익, 1919년 4월 2일 만세운동 주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28일 - 김한익,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33년 6월 30일연표보기 - 김한익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7년 10월 1일 -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82년 8월 15일 - 김한익,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추모 시기/일시 1990년 12월 26일연표보기 - 김한익,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김한익, 함양읍 장날 의거
출생지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연덕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지도보기
묘소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지도보기
묘소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필봉산길 49[교산리 1047-1]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함양읍 장날 의거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김한익(金漢益)[1890~1933]은 1890년 9월 13일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연덕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전국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가운데 이보다 앞서 3월 28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던 정순길(鄭淳吉), 윤보현(尹普鉉), 정순귀(鄭淳貴), 노경식(盧璟植) 등 4명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김한익은 다음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인근 지역의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김한익은 4월 2일 아침 자기 집에서 만든 대형 태극기를 품에 숨긴 채 장터에 잠입하여 시장 중앙에 쌓아 놓은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가서 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3,0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으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한 김한익은 고문으로 인하여 불구의 몸으로 생활하다 1933년에 사망하였다.

[묘소]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에 있었으나 국가보훈처와 함양군의 지원으로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선영으로 묘소를 이전하고 새로 단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7년, 함양 상림공원 내에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가 건립됐다. 1982년에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받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 『함양군사』 (함양군사편찬위원회, 2012)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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