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응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800
한자 盧應奎
영어공식명칭 Rho Eunggy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동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1년 3월 15일연표보기 - 노응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노응규, 진주의진 총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10월~1905년 11월 - 노응규, 규장각 주사·경상남도 사검 겸 독쇄관·중추원 의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6년 6월 - 노응규,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월 21일 - 노응규, 밀정의 밀고에 의해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07년 2월 19일연표보기 - 노응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12월연표보기 - 노응규,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지도보기
활동지 진주의진 - 경상남도 진주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

[정의]

개항기에 활동한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출신의 의병장.

[가계]

노응규(盧應奎)[1861~1907]는 1861년 3월 15일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신암(愼菴),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활동 사항]

노응규는 어린 시절부터 영남 유림의 권위자로 알려진 성재(省齋) 허전(許傳)[1797~1886]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30세 전후에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사사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공표 등 일제의 만행으로 수많은 유생이 의병 항쟁을 일으키게 되자 정통 유학자 출신 노응규는 1896년 2월 승려 서재기(徐再起)[?~1896]를 선봉장으로 하여 문인 정도현(鄭道玄), 박준필(朴準弼)[1872~1941] 등 유생들과 함께 함양 안의에서 의병진을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2년 2월 진주성을 공격하여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고 진주성을 장악하였으며, 여러 차례 이어진 관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후 활동 범위를 넓혀 함양과 김해 등지로 진출하여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노응규를 중심으로 한 진주의진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자 관군과 합세한 일제에 의하여 대규모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의병 활동을 함께한 정한용(鄭漢鎔)의 이탈, 선봉장 서재기가 일제의 간계에 빠져 피살 당한 일련의 사건으로 진주성을 상실하고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이 과정에​서 노응규의 생가는 불타고 아버지가 피살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노응규의 충의를 알아준 고종에 의하여 1902년부터 규장각 주사, 경상남도 사검 겸 독쇄관, 중추원 의관 등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1906년 6월 최익현의 막하에서 활약하며 의병 투쟁을 재개하였다. 노응규는 충청북도 황간에서 다시 창의하고 서울을 진공하여 일본군을 칠 계획으로 문태서 의병장과 연대하며 활동하는 한편 경부선 철도 파괴, 열차 전복, 일본군 척후대 공격 등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1907년 1월 체포된 뒤 일제의 가혹하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07년 2월 19일 경무감옥소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12월 13일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으며, 1997년 1월부터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가장 먼저 선정되었다.

2008년 함양군에서 19억 2,000만 원을 들여 고향인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의 집터 추정지 인근에 생가를 복원하고 노응규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7.27 수정 오탈자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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