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15
한자 集姓村
이칭/별칭 동성마을,동족촌,동족집단,동족부락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에서 같은 성씨가 오랜 기간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지역.

[개설]

집성촌은 동성동본의 부계 혈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서 ‘동성마을’, ‘동족촌’, ‘동족집단’, ‘동족부락’이라고도 한다. 집성촌은 우리나라 전통 농경 사회에서 생성된 촌락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 혹은 고대까지 올려 잡기도 하지만, 사회 전반에 성리학 이념이 뿌리를 내려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정착되는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집성촌의 형성은 가부장적 종법 질서의 일반화 경향과 함께 새로운 사족 촌락의 발생,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 농지의 확대과정, 여기에 친족 및 가족제도의 변화가 연계되면서 확산되었다.

[형성]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함양군 성씨조에는 함양의 토성(土姓) 여(呂)·오(吳)·서(徐)·박(朴)·조(曺)씨 등 5개 성씨와 속성(續姓) 이(李)씨, 마천소(馬淺所) 성씨 조(曺)씨가 소개되어 있다. 토성은 『경상도지리지』가 편찬되기 이전부터 당시까지 존속하였던 성종(姓種)이고, 망성·내성·속성 등은 편찬 당시 이미 없어졌거나 새로이 해당 군현에 편입된 성종이다. 그러므로 함양여씨 등 함양의 토성 5개의 성씨는 『경상도지리지』가 편찬되는 1425년(세종 7) 이전부터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 자리 잡은 성씨로서 그 연원은 고려 전기까지 올라간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 집성촌의 시원은 고려 시대 이 지역 토성들이 고을 치소(治所)에 거주하면서부터이다. 치소 혹은 읍치(邑治)는 군현 행정의 중심지로서, 수령이 집무하는 곳인 관아시설과 재지 세력인 토성층의 자치기구인 읍사(邑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구가 밀집된 곳이었으며, 지방행정의 기반 시설인 시장과 객사·누정·도로망이 구축된 곳이었다.

고려 시대 군현 치소는 조선 시대의 치소가 평지에 있는 것과 달리 나지막한 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상남도 함양의 고려 시대 치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 고적조에 소개되어 있는 ‘고읍성(古邑城)’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고읍성은 조선 시대 읍성에서 4리 정도 거리의 관변리에 있었다. 함양의 토성들은 바로 이 관변리 지역에 거주하면서 재지 유력자로서, 읍사를 중심으로 수령의 지방행정을 보좌하고 있었다.

한편 다른 지역 토성의 가계가 경상남도 함양 지역으로 끊임없이 이동해오고 있었다. 타 지역 성씨들은 함양으로 입향하여 치소 밖 여러 지역에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고려 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함양으로 입향한 성씨는 보성선씨, 하동정씨, 성주이씨, 초계정씨, 함안조씨, 경주김씨, 광산김씨 등 7개 성씨이다. 보성선씨 선국충(宣國忠)은 충숙왕 때 경상남도 함양에 들어와 치소 북쪽 도점(道店)에 정착하였고, 하동정씨 정지의(鄭之義)는 충목왕대에 지곡면 개평(介坪)에 자리잡았다. 성주이씨 이억년(李億年)은 충혜왕 때에 경상북도 성주에서 경상남도 함양으로 들어와 그 자손들이 화촌(花村)과 휴천(休川)에 거주하였다. 함안조씨 조경(趙璥)과 초계정씨 정전(鄭悛)은 우왕 때에 덕곡(德谷)에, 경주김씨 김점(金點)과 광산김씨 김광련(金光鍊)도 우왕 때에 각각 개평(介坪)과 관변(官邊)에 자리 잡았다.

조선 건국 후 선조 대까지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 입향한 성씨는 55개 성씨 정도 확인된다. 그 가운데 조선 초인 성종 대까지 입향한 성씨는 함양박씨, 단양우씨, 나주임씨, 풍천노씨, 남원양씨, 양성이씨, 신창표씨, 나주박씨, 밀양박씨, 남양홍씨, 은진송씨, 성주이씨, 하양허씨, 경주정씨, 울진임씨, 고령유씨, 함안윤씨, 성주배씨, 안동김씨, 창녕성씨, 삼척박씨, 여산송씨, 여양진씨, 청주한씨, 성주도씨, 초계변씨, 진주하씨, 화순최씨, 영천이씨, 진주강씨 등 30개 성씨이다. 조선 중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입향한 성씨는 25개 정도 확인된다. 무안박씨, 선산김씨, 은진임씨, 연안이씨, 죽산박씨, 안동권씨, 창녕조씨, 김녕김씨, 합천이씨, 진양정씨, 서산정씨, 동래정씨, 탐진최씨, 나주나씨, 전주이씨, 거창신씨, 달성서씨, 대구서씨, 이천서씨, 신창맹씨, 수원백씨, 강화노씨, 충주지씨, 거창장씨, 청주한씨 등이 이들이다.

조선 전기까지 경상남도 함양으로 이주해온 입향조들은 전란을 피해 찾아든 경우, 정치적으로 권력에서 밀려 유배당하거나 은거하고자 옮겨온 경우,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경우 등이 있다. 혼인관계에 따라 이주하는 경우도 다수 발견된다. 하동정씨 정지의(鄭之義)는 함양에 먼저 정착한 보성선씨 선국충(宣國忠)의 손녀와 혼인하여 함양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초계정씨 정전(鄭悛)은 정지의의 사위가 되어 함양에 정착하였다. 경주김씨 김점(金點)도 정지의의 손녀와 혼인하여 함양에 들어와 살았고, 풍천노씨 노숙동(盧叔仝)[1403-1463]은 경주김씨 김점의 사위가 되어 창원에서 함양 개평(介坪)으로 옮겨 살았다. 나주박씨 박안경(朴安敬)은 정랑 오을경(吳乙卿)의 사위로 세종 때에 함양의 대수(大樹)에 정착하였으며, 함안윤씨 윤원동(尹元仝)은 함양박씨 박흥택(朴興澤)의 손서(孫壻)로 세조 때에 함양 백전(栢田)에 정착하였다. 여산송씨 송천희(宋天喜)는 앞서 입향한 윤원동의 사위로 성종 때에 백전에 자리 잡았다.

경상남도 함양에 입향하기 이전 성씨의 근거지는 거창·남원 등 가까운 지역도 있지만 본관지로부터 이동한 경우는 파주·청주·충주 등 먼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경우도 많았다. 몇몇 가문은 조선 전기까지 여러 차례 입향한 경우도 눈에 띈다. 성주이씨, 남원양씨, 남양홍씨, 경주정씨, 진주강씨, 청주한씨, 안동권씨, 김녕김씨, 합천이씨, 진양정씨, 서산정씨, 창녕조씨, 달성서씨, 이천서씨, 밀양박씨, 단양우씨 등은 조선 전기까지 2~3회에 걸쳐 함양 지역으로 입향하였다. 함양의 토성에서 사족이 되어 수도나 경기 지역에 거주하다가 본관으로 돌아오는 사례도 있었다. 함양박씨 박습(朴習)이 태종조에 서울에서 함양으로 이주한 것이 그 예이다.

조선 후기에는 고종 대까지 수많은 성씨의 인물들이 함양으로 입향하고 있다. 이미 조선 전기에 입향한 성씨가 계속해서 함양으로 입향하는 한편, 새로운 성씨가 함양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비로소 함양으로 입향하는 성씨는 김해김씨 등 79개 성씨 정도 확인된다. 김해김씨는 조선 후기에야 함양으로 입향하지만, 그 횟수가 40회에 이를 정도로 조선 고종 대까지 함양으로 입향이 끊이지 않았다. 김해김씨를 비롯해서 고려에서 조선 말까지 5회 이상 함양 지역으로 입향한 성씨는 밀양박씨[46], 진주강씨[25], 김녕김씨[15], 경주김씨[15], 경주이씨[12], 합천이씨[11], 진양정씨[10], 전주이씨[10], 청주한씨[10], 안동권씨[10], 달성서씨[10], 동래정씨[9], 함양박씨[8], 창녕조씨[8], 광산김씨[8], 파평윤씨[7], 수원백씨[7], 남원양씨[6], 남양홍씨[6], 인동장씨[6], 함안조씨[5], 안동김씨[5], 단양우씨[5], 성주이씨[5], 담양전씨[5], 경주최씨[5] 등 27개 성씨이다.

이처럼 고려에서 조선 후기까지 함양의 토성을 비롯해 수많은 성씨가 끊임없이 함양으로 입향하였고, 그 가운데 여러 차례 입향한 성씨들이 나타나면서 정착한 지역을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동성(同姓) 마을로서의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현황]

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의 성』에서는 당시 전국의 집성촌[동족집단]을 시·군 단위로 집계하였다. 이 가운데 경상남도 함양군의 집성촌도 소개되었다. 당시 통계에서 함양에 거주하는 성의 수는 106개[본관 미분류]에 인구가 1만 6,419명이었고, 집성촌은 면·리별로 15가구 이상 거주하는 성씨를 기준으로 삼았다. 경상남도 함양군의 집성촌과 성씨별 가구수는 다음과 같다.

함양면 백천리[진양강씨 18], 교산리·대덕리[풍천노씨 24] | 석복면 삼산리[선산김씨 50] | 지곡면 개평리[하동정씨 37, 풍천노씨 32], 평촌리[풍천노씨 35, 김해김씨 21], 덕암리[서산정씨 36, 하동정씨 15, 진양강씨 21, 달성서씨 15], 마산리[하동정씨 29], 남효리[동래정씨 19], 창평리[진양강씨 42], 시목리[수원백씨 25], 공배리[하양허씨 21, 남원양씨 23], 보산리[하양허씨 35, 전주이씨 15] | 휴천면 월평리[합천이씨 15], 목현리[진양정씨 28, 죽산박씨 39], 송전리[평산신씨 20], 문정리[진양강씨 28] | 유림면 손곡리[합천이씨 21, 진양정씨 15, 김해김씨 30, 경주김씨 30], 웅평리[밀양박씨 75, 달성서씨 74], 옥매리[풍천노씨 53] | 수동면 우명리[하동정씨 35], 가성동[삼척박씨 35], 원평리[나주임씨 40], 도북리[안동권씨 60], 내백리[진양강씨 45], 상백리[동래정씨 30, 전주이씨 20] | 병곡면 옥계리[김해김씨 47], 원산리[경주김씨 47], 광평리[김녕김씨 43], 송평리[성주이씨 38], 도천리[진양하씨 78] | 마천면 덕전리[현풍곽씨 25], 삼정리[남원양씨 21, 평산신씨 15], 군자리[청주한씨 18], 창원리[김해김씨 15] | 백전면 평정리[삼척박씨 22], 대안리[남원양씨 18], 경백리[삼척박씨 32, 단양우씨 17], 양백리[진양강씨 21] | 안의면 금천리[김해김씨 45, 경주최씨 44], 당본리[진양하씨 58, 밀양박씨 28], 황곡리[여산송씨 28, 전주이씨 18], 진목리[김녕김씨 42], 도림리[성주이씨 43, 탐진최씨 34], 초동리[밀양박씨 23, 안동김씨 19, 동래정씨 18], 봉산리[동래정씨 29], 귀곡리[밀양박씨 35], 대대리[합천이씨 52], 신안리[초계정씨 39], 월림리[밀양박씨 16, 단양우씨 15, 진양강씨 27] | 서하면 봉전리[정선김씨 97], 송계리[정선김씨 70], 황산리[거창장씨 42, 은진송씨 35], 운곡리[해주오씨 41] | 서상면 대남리[밀양박씨 43, 달성서씨 55, 김해김씨 21], 상남리[창녕조씨 32]

당시 집성촌은 함양의 상당수 지역[리]에 형성되었다. 면별로 보면 지곡면안의면은 8개의 리에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석복면은 삼산리 한 곳에 집성촌이 있었다. 리 단위에서는 지곡면 덕암리유림면 손곡리에 집성촌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덕암리에는 서산정씨[36], 하동정씨[15], 진양강씨[21], 달성서씨[15] 등, 손곡리에는 합천이씨[21], 진양정씨[15], 김해김씨[30], 경주김씨[30] 등 각각 4개 성씨의 집성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씨별로는 진주강씨를 비롯해 37개 성씨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2개 이상의 집성촌을 형성한 성씨는 진주강씨[7], 김해김씨[6], 밀양박씨[6], 하동정씨[4], 풍천노씨[4], 동래정씨[4], 달성서씨[3], 삼척박씨[3], 전주이씨[3], 합천이씨[3], 남원양씨[3], 경주김씨[2], 김녕김씨[2], 정선전씨[2], 성주이씨[2], 진양정씨[2], 진양하씨[2], 하양허씨[2], 단양우씨[2], 평산신씨[2] 등 20개 성씨이다.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50가구 이상의 집성촌은 석복면 삼산리[50]의 선산김씨, 서하면 봉전리[97]와 송계리[70]의 정선전씨, 유림면 웅평리[75]의 밀양박씨, 안의면 대대리[52]의 합천이씨, 유림면 옥매리[53]의 풍천노씨, 병곡면 도천리[78]와 안의면 당본리[58]의 진양하씨, 유림면 웅평리[74]와 서상면 대남리[55] 달성서씨, 수동면 도북리[60] 안동권씨 집성촌 등이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됨에 따라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어 농촌 지역은 인구감소의 현상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시·군 단위의 농촌 지역사회 내에서도 읍내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어 기존 면·리의 인구가 이동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함양군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 때까지 형성 유지되었던 집성촌의 모습에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성촌의 규모나 내용·운영에 있어서도 변화를 수반하면서, 농촌에 남아 있는 일부 후손들에 의해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0년도 통계청 성씨 본관별 가구 및 인구통계에 따르면 경상남도 함양군에는 156개의 성과 1,375개의 본관이 있고, 1만 6,008가구에 인구가 4만 1,869명이었다. 이 가운데 50가구 이상 거주하는 본관 성씨는 김해김씨 등 56개 성씨이다. 이들 성씨의 가구와 인구수는 아래와 같다.

김해김씨[1,491/3,954], 밀양박씨[1,304/3,249], 진주강씨[708/1,807], 전주이씨[553/1,547], 풍천노씨[481/1,099], 경주김씨[414/1,146], 나주임씨[372/953], 합천이씨[364/949], 경주이씨[354/997], 동래정씨[328/820], 경주최씨[316/833], 김녕김씨[283/721], 달성서씨[283/717], 하동정씨[261/641], 함양박씨[254/680], 안동권씨[249/653], 남원양씨[241/580], 함안조씨[217/566], 진양하씨[206/529], 진양정씨[177/453], 성주이씨[175/436], 청주한씨[174/465], 광산김씨[162/414], 삼척박씨[157/356], 해주오씨[156/399], 파평윤씨[155/406], 창녕조씨[143/370], 수원백씨[142/317], 정선전씨[124/317], 안동김씨[114/282], 하양허씨[109, 251], 남평문씨[108/286], 인동장씨[108/269], 초계정씨[106/279], 남양홍씨[105/281], 반남박씨[104/278], 분성배씨[104/269], 단양우씨[99/235], 경주정씨[93/254], 은진송씨[97/256], 선산김씨[86/216], 죽산박씨[80/188], 평산신씨[79/207], 청송심씨[78/205], 파주염씨[76/174], 거창신씨[75/203], 여양진씨[73/183], 함양오씨[72/231], 나주임씨[68/146], 이천서씨[67/181], 거창유씨[67/187], 거창장씨[67/160], 전주최씨[59/170], 현풍곽씨[56/156], 밀양손씨[55/135], 여흥민씨[54/174].

이들 56개 성씨에는 1934년의 통계에서 집성촌을 형성했던 성씨들이 대부분 포함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몇몇 변화를 볼 수 있다. 1934년 통계 당시 함양은 106개의 성에 인구 1만 6,419명이 거주하는 고을이었다. 그러나 2000년 통계 당시 함양 성의 수는 1934년 통계에 비해 50% 정도, 인구는 2.5배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34년 통계 당시 집성촌을 형성하였던 성씨들의 인구 규모도 증가하였을 것인데, 몇몇 성씨는 오히려 줄어든 경우가 보인다. 1934년 당시 정선전씨는 서하면 봉전리송계리에 각각 97가구와 70가구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2000년 통계에서는 정선전씨 가구수가 124개로 집계되어 축소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산정씨와 탐진최씨도 각각 지곡면 덕암리[36가구]와 안의면 도림리[34가구]에 집성촌을 형성한 바 있는데, 2000년 통계에서는 50가구 이상 성씨 범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여산송씨도 안의면 황곡리에 28가구 규모의 집성촌이 있었는데, 2000년 통계에서는 32가구 정도 유지하는 데 그치고 있다.

경주이씨·함안조씨·광산김씨·파평윤씨 등은 1934년 통계에서 집성촌 범위에 들지 않았었는데, 2000년 통계에서는 150가구 이상의 규모를 갖는 성씨로 집계되고 있어 집성촌이 이미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주이씨는 조선 후기 현종 때부터 함양으로 입향하기 시작하여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12회 정도 지속적으로 입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하백마을, 안의면 월림리 방정마을 등에 경주이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함안조씨는 고려 후기 우왕 때에 조경(趙璥)이 지곡면 덕곡에 정착한 바 있고, 이후에도 지곡면서상면 일대에 입향하고 있어서 집성촌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보산리 효산마을, 마산리 계곡마을과 마산마을, 안의면 귀곡리 귀곡마을함안조씨 가구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광산김씨도 우왕 때에 김광련(金光鍊)이 함양면 관변에 정착한 이후 조선 시대에도 마천, 휴천, 유림, 안의면 일대로 7회에 걸쳐 입향하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신관리 관변마을마천면 의탄리 의중마을이 광산김씨와 연관이 있다. 파평윤씨는 조금 뒤늦은 시기지만 조선 순조 대부터 마천, 함양, 휴천, 유림, 안의, 서하면 등으로 입향하고 있어서 이 중 특정 지역에 집성촌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교북리 후암마을서하면 다곡리 대황마을에 파평윤씨가 많이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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