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여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24
한자 咸陽呂氏
영어공식명칭 Hamyang Yeo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함양 - 경상남도 함양군
세거|집성지 임호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관변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신관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삼휴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삼산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여어매

[정의]

경상남도 함양을 본관으로 하고 여어매를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

[연원]

함양여씨(咸陽呂氏)의 시조는 중국 내주(萊州) 사람인 여어매(呂御梅)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역임한 여어매는 황소의 난을 피하여 877년(헌강왕 3)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여어매는 여임청(呂林淸)과 여광유(呂光有) 두 아들을 두었다. 여임청의 후손인 여자장(呂子章), 여존혁(呂存赫) 형제와 여광유의 후손들이 함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어 왔다.

『고려사』에서 확인되는 함양여씨 인물로는 여위(呂渭), 여칭(呂稱)[1351~1423], 여극인(呂克禋) 등 3명에 지나지 않는다. 여위는 1353년(공민왕 2) 감찰지평에 임명된 것으로 나타나며, 여칭은 1383년 당시 전라도안렴사를 역임하고 있으며, 여극인은 고려 말 우왕 대에 장령의 자리에 있으면서 안종원(安宗源)[1325~1394] 등과 함께 상소하여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사사로운 교역 행위를 금할 것을 건의한 바 있다.

여칭은 조선 건국 후에도 벼슬길에 나가 태종 때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개성유후(開城留後), 형조판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였다. 조선 시대에 함양여씨는 문과 급제자 33명, 무과 급제자 27명을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경상도지리지』(1425)와 『세종실록지리지』의 함양군 성씨조에는 함양군의 토성으로 여(呂)·오(吳)·서(徐)·박(朴)·조(曺)씨 다섯 성씨를 들고 있다. 함양여씨는 함양의 토성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 임호(林湖)마을의 처음 이름은 여림청(呂林淸)으로 불렀다고 한다. 여림청은 바로 함양여씨 2세인 대장군 여임청을 지칭한 것으로, 고려 중기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함양여씨의 본거지이다.

고려시대 재지 세력인 토성층은 형성된 시기부터 끊임없이 분화하고 있었다. 토성의 분화는 토성층 내에서 사족(士族)으로의 분화, 토성으로서의 지위 상실 등으로 나타났다. 함양 지역 토성들 가운데에서도 고려 후기가 되면 끊임없이 관료를 배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함양여씨도 관료를 배출하여 사족으로 성장한 가계는 거경사족이 되어 함양을 떠날 수도 있었고 수도권이나 다른 지역에서 거주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분화해 간 결과 함양여씨는 본관지 함양을 비롯하여 경향 각지에 세거지를 두게 되었다. 함양 외 다른 지역에 세거지를 마련한 함양여씨가 다시 함양으로 들어온 사례는 확인할 수 없다. 오늘날 함양군에 거주하는 함양여씨 주민은 본래부터 함양 지역에 살아온 토성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현황]

2000년의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함양여씨는 전국에 8,040가구 2만 5,667명, 함양군에는 24가구 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조사에서는 전국에 3만 4,835명, 함양군에는 51명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함양군 지역 인구에서 함양여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함양읍 신관리 관변마을, 함양읍 삼산리 삼휴마을, 휴천면 호산리 임호마을 등이 함양여씨가 살았거나 연관이 있는 마을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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