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정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20
한자 河東鄭氏
영어공식명칭 Hadong Je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고려 후기 - 하동정씨, 정지의 입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5월 26일 - 함양 남계서원, 사적 제499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1월 14일 - 함양 일두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1월 23일 - 함양우명리정씨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 10월 21일 - 함양개평리하동정씨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1호로 지정
본관 하동 - 경상남도 하동
입향지 개평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웅곡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웅곡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동호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회동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남계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효리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하교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하교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마산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마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덕암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정도정
입향 시조 정지의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정도정을 시조로 하고 정지의를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개설]

함양군의 하동정씨(河東鄭氏)는 고려 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낸 정지의(鄭之義)가 오늘날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세거가 시작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하동정씨의 함양 입향은 몇 차례 더 이루어졌다.

[연원]

17세기 중반 조종운(趙從耘)[1607~1683]이 편찬한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하동정씨 가계를 일곱 가계로 소개하였는데, 족보상으로 하동정씨는 계통을 달리하는 가계가 셋 있다. 1. 정도정(鄭道正), 정석숭(鄭石崇), 정탁신(鄭卓申), 정의균(鄭義均), 정연서(鄭延叙), 정국룡(鄭國龍), 정지연(鄭芝衍)[1525~1583]의 가계, 2. 정손위(鄭遜位), 정세유(鄭世裕), 정숙첨(鄭叔瞻), 정안(鄭晏)[?~1251]의 가계, 3.정응(鄭膺), 정성(鄭晠), 정계(鄭綮), 정승경(鄭承慶), 정태보(鄭台輔), 정희(鄭熙)의 가계이다. 이 가운데 정도정을 시조로 하는 가계는 정연서가 정국룡과 정국교(鄭國僑) 두 아들을 두고 정국룡이 다시 정지연과 정난연(鄭蘭衍) 두 아들을 두었으며, 정지연이 정익(鄭翊)과 정유(鄭宥) 두 아들을 둠으로써 가계의 번성을 가져왔다. 정유의 후예는 함양으로 입향하게 된다.

하동정씨는 고려 말까지 많은 관료를 배출하였다. 관료는 정세유의 가계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정세유는 명종대 무반으로 진출하여 상서를 역임하였고, 정세유의 아들 정숙첨은 평장사라는 고위직을 역임하고 최씨정권과도 혼인관계를 맺었다. 정숙첨의 아들 정안은 과거로 입사(入仕)[벼슬한 뒤에 처음으로 그 벼슬자리에 나아감]한 후 낙향과 복귀를 반복하면서 고위직 참지정사를 역임하였다. 정국룡의 가계에서는 그의 아들 정지연이 관료로 진출하여 고위직을 지냈다. 정지연은 원 간섭기 통역관 출신으로, 원나라를 오가며 당시 현안 해결에 공을 세웠다. 정지연은 충선왕대에 좌상시·동지밀직사사를 역임하고, 충숙왕대에는 첨의찬성사에 올라 재상급 인물로 성장하였다.

고려 말에는 하동정씨 여러 가계에서 관료를 배출하였다. 정지상(鄭之祥)은 1354년(공민왕 3)에 사헌 지평을 지내고 호부시랑, 어사중승을 거쳐 판사를 끝으로 벼슬을 마쳤다. 정계의 가계에서도 증손 정희가 1376년(우왕 2)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 공양왕 대에 사헌부 장령, 집의 등 주로 언론 관련 업무에 종사하다가 조선 건국 주도 세력에 의하여 정몽주(鄭夢周)[1337~1392]가 살해되면서 그 당여(黨與)[목적, 행동 등이 같거나 함께하는 무리. 일당]로 지목되어 김진양(金震陽)[?~1392]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입향 경위]

1656년(효종 7)에 정수민(鄭秀民)[1577~1658]이 편찬한 『천령지』 인물조에서는 하동정씨 인물로 맨 처음 죽당(竹堂) 정복주(鄭復周)[1367~?]를 소개한다. 정복주는 고려 말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낸 정지의(鄭之義)의 아들로, 치소(治所)[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북쪽의 개평촌[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에 대대로 살았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하동정씨가 함양으로 입향하는 것은 고려 충목왕 때 정지의가 들어오면서부터로, 이후 정복주·정육을(鄭六乙)·정여창(鄭汝昌)[1450~1514]으로 이어지면서 함양의 세거 성씨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하동정씨의 함양 입향은 몇 차례 더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후손 정경업(鄭慶業)이 하동으로부터 들어와 그 자손들이 화산[수동면 화산리]에 세거하였으며, 영조 때 진사 정국교(鄭國僑)의 후손 정필경(鄭必敬)은 진주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동호[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 철종 때는 지평 정여해(鄭汝諧)[1450~1530]의 후손 정치석(鄭致錫)이 전라남도 화순에서 들어와 평정[백전면 평정리 평정마을]에서 세거하였다.

[현황]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姓)』에는 함양의 하동정씨 집성촌으로 지곡면개평리 37세대, 덕암리 15세대, 마산리 29세대와 수동면 우명리 35세대 등으로 보고되었다. 2000년에 실시한 통계청 인구 총조사의 성씨와 본관별 통계에 의하면 하동정씨는 전국에 모두 4만 9,440가구 15만 8,396명, 함양군에는 261가구 6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통계에서는 전국에 18만 7,152명, 함양군이 576명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 통계에 비해 하동정씨 인구는 전국에 3만 명 가까이 증가한 데 비하여 함양군에서는 65명 정도 감소한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오늘날 함양군의 하동정씨는 함양읍 웅곡리 웅곡마을,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 유림면 서주리 회동마을, 수동면 원평리 남계마을우명리 효리마을하교리 하교마을, 지곡면 마산리 마산마을덕암리 덕암마을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관련 유적]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1552년(명종 7)에 건립된 함양 남계서원이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 정여창의 옛집 함양 일두 고택(咸陽 一蠹古宅)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여창 일두문집 목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6호], 함양 정여창 묘역[경상남도 기념물 제268호], 함양 정여창 사당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9호] 등이 있다. 이외에 함양 우명리 정씨 고가(咸陽牛鳴里鄭氏古家)[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함양 개평리 하동정씨 고가(咸陽介坪里河東鄭氏古家)[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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