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에서 만난 최치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08
한자 咸陽上林-崔致遠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현대/현대
집필자 김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함양 상림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 지도보기

[정의]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재직 중에 조성된 상림과 현재 상림의 모습.

[사람이 만든 숲, 상림]

상림은 제방을 보호하기 위한 숲이라 하여 호안림(護岸林)이라 한다. 예전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상림은 사람의 힘으로 조성된 숲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다. 또한 홍수피해로부터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숲이기도 하다. 이러한 숲을 만든 조상들의 지혜는 상림의 역사적 가치에 문화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림함양읍의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가를 따라서 숲을 조림하였다. 그러나 숲의 가운데 부분이 홍수로 인해 무너지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게 되었다. 현재 하림은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고, 상림만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상림에 살아 있는 식물은 200여 종이다. 소나무·측백나무·노간주나무 등의 나자식물(裸子植物)을 비롯하여 임관(林冠)[수림(樹林) 위층의 전체적인 생김새]의 상층을 만들고 있는 수종(樹種)은 개서어나무·까치박달·밤나무·굴참나무·신갈나무·갈참나무·상수리나무·졸참나무·갈졸참나무·떡갈나무·참느릅나무·느티나무·잔털벚나무·벚나무·야광나무·아카시아·다름나무·회화나무·쉬나무·고로쇠나무·좁은단풍나무·신나무·은백양·감나무·고나무·말채나무·물푸레나무·이팝나무·참오동·물갬나무 등이 있다.

밑층은 개암나무·백동백나무·좀깨잎나무·꾸지뽕나무·산뽕나무·고랑나무·국수나무·살딸나무·복사나무·윤노리나무·콩배나무·지귀나무·조록싸리·풀싸리·참싸리·싸리·산초·사람주나무·붉나무·개옻나무·고추나무·화살나무·회잎나무·보리수나무·키버들·능수버들·갯버들·진달래·산수유나무·노린재나무·쪽동백나무·쥐똥나무·작살나무·누리장나무·병꽃나무·백당나무 및 덜꿩나무 등이 차지한다.

이들 숲에 멍석딸기·복분자딸기·찔레꽃·칡·노박덩굴·새머루·왕머루·개머루·가마귀머루·담쟁이덩굴·인동덩굴·계요등·청가시덩굴 및 청미래덩굴이 엉켜 있고, 때로는 박태기나무·배롱나무·탱자나무 및 오죽 등의 관상수도 보인다.

[백성을 사랑한 최치원, 상림을 만들다]

최치원은 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태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위천함양읍의 중앙을 흐르고 있었으며, 매년 홍수 피해를 불러와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둑을 쌓았고, 강물의 흐름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 이 숲이 지금의 상림이다.

최치원은 신라 말 육두품 출신의 학자이다. 그리고 868년 어린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한 조기 유학생이기도 하였다. 당나라 내에서 최치원의 능력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874년 빈공과에 합격하였고, 879년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지어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다. 귀국 후에는 신라 골품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애썼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책 10여 조는 신라 정부의 개혁을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최치원의 의도는 신라 골품체제에 안주하였던 지배세력의 기득권 유지로 인하여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최치원 주로 지방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고, 끝내는 가야산의 산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의 죽음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따라서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올 뿐이다. 최치원의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을 보여주는 일은 함양태수로 있는 동안 상림을 만든 것이었다.

[전설이 된 최치원의 효성]

전설 속에도 최치원의 효성을 읽을 수 있다.

최치원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최치원은 어머니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여기고 어머니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으며, 어머니의 뜻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하늘이 낸 효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혼자서 바람을 쐴 겸 아들이 조성한 상림에 산책을 나가 풀숲에서 쉬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어머니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하여 더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에 아들에게 숲에서 쉬다가 뱀을 보고 놀란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최치원은 어머니에게 송구함을 금치 못하며 주문을 써 상림 숲으로 달려가, 숲을 향해 주문을 외우고 해충들을 꾸짖었다. 최치원은 오늘 이후로는 뱀이나 개미 같은 해로운 모든 동물이나 해충은 일절 나타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후로는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 때문인지 뱀이나 개구리 곤충들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상림의 물길을 돌릴 때 사람의 힘으로는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늘이 감동하여 밤에 억수 같은 비를 내리고, 용이 하늘로 오르면서 꼬리를 쳐 물길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최치원의 효성,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지고 전승된 옛이야기일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함께하는 공간, 상림]

상림은 경상남도 함양 지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역사와 문화공간이다. 이러한 상림에서는 함양을 지켜내고 가꾸어 넓고 깊은 내력을 지닌 마을로 만들었던 옛사람들의 정취를 만날 수 있다. 2001년 조성된 함양 상림에 있는 역사인물공원에는 함양의 대표적 역사 인물 11명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11명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 최치원은 함양태수로 있으면서 상림을 조성한 인물이다. 조승숙(趙承肅)은 조선 건국을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던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조선 시대 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며 학자이다. 양관(梁灌)은 조선 전기의 청백리였으며, 유호인(兪好仁)은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여창(鄭汝昌)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에 증진하였으며 조선 전기 사림의 대표적 학자이다. 노진(盧禛)은 청백리로서 성리학과 예학에 밝았다. 강익(姜翼)은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서 안의현감을 지냈다. 한말 의병장 문태서(文泰瑞), 한말 유교개혁사상가 이병헌(李炳憲)이 조각되어 있다.

상림과 관련된 백성들의 이야기도 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밀양박씨 이야기다. 박씨는 정혼하였다는 이유로 19세 때 병든 신랑 임술증과 결혼한다. 그러다 남편이 죽자 3년상을 치른 뒤,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한 열녀다. 1793년 안의현감으로 있던 박지원은 박씨 이야기를 ‘열녀함양박씨전’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현재 ‘함양 열녀 밀양박씨지려(咸陽烈女密陽朴氏之閭)’라는 정려비가 남아 있다.

상림에는 조선 후기 외세침략과 그 아픔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척화비가 그것이다. 1871년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은 쇄국 의지를 모든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각처에 척화비를 세웠다. 상림의 척화비에는 다른 척화비와 마찬가지로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이라 새겼다. 이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 만년에 경고하노라’는 흥선대원군의 굳은 결의가 담겨 있다.

정려비와 척화비 외에도 다양한 비가 상림에 있다. 을사조약 후 일본에 항거한 의병장인 권석도(權錫燾) 장군 기념비와 일제 강점기 함양읍 만세기념비이다. 일제 강점기 함양읍 만세기념비는 1919년 3월 28일 함양읍 장날의거를 기념해 1985년에 세운 기념비이다. 이 외에도 1919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되어 출옥한 뒤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김한익의 기념비도 있고,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와 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도 있다. 만세시위 과정에서 순국한 하승헌의 기념비도 있다. 해방 이후의 함양의 모습을 담은 4·19학생 의거기념탑도 있다.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공원 속에 자리잡은 건축물에도 의미가 있다. 금호미다리는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을 담고 있는 건축물이다. 최치원이 상림숲 조림을 마치고 숲속 어디쯤에 금호미를 걸어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금호미다리는 이 전설에 따른 이름이다. 함양 천령문화제 행사에는 금호미 찾기 놀이가 진행되기도 한다.

상림 내의 정자로는 함화루, 사운정, 초선정, 화수정 등이 있다. 함화루는 과거 함양읍성 남문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 도시계획이라는 명분으로 강제로 철거하자, 193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본래의 이름은 남문에서 지리산이 보이기 때문에 망악루(望嶽樓)라 하였지만, 옮기면서 함화루(咸化樓)로 고쳤다. 이때 김종직은 망악루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작년 내 발자취가 저 멧부리 더럽혔거니

망악루 올라서 다시 보니 무안하구나

산신령도 다시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사운정(思雲亭)은 1906년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여 모현정(慕賢亭)이라 불렀으나, 고운 선생 추모라는 뜻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화수정(花樹亭)은 1972년 파평윤씨 종중이 집안끼리 우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는데, 상림을 찾는 많은 사람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또한 상림에서는 다양한 조형물도 볼 수 있다. 함양 이은리 석불함양읍 이은리 냇가에서 출토된 것을 옮겨 온 것이다. 고려 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상림과 비운의 최치원, 창작예술로 부활하다]

2017년 6월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는 〈길 위에서 : 천년의 숲〉이란 제목의 창작극이 공연되었다. 〈길 위에서 : 천년의 숲〉은 홍수로 고통받던 함양 백성을 위해 인공림, 즉 상림을 만든 최치원의 애민 스토리를 바탕으로 만든 창작극이다. 이 작품은 함양군문화예술회관과 극단 현장이 2017년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공동제작하였다. 상림최치원을 지역의 문화 콘텐츠로 제작한 것이다. 임미경 작가가 글을 쓰고, 극단 현장 고능석 대표가 연출하였다.

임경미 작가는 “글을 썼던 2016년은 천 년 전 최치원이 살던 진성여왕 시기와 맞닿아 있었다. 거대한 세상의 벽 앞에 절망스러웠을, 그리고 다잡았을 고운 선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그 마음을 작품에 녹여내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하였다.

고능석 연출가는 “최치원 선생 자료를 찾아보면서 개혁을 꿈꾸었던 위대한 천재가 지방의 작은 현 태수를 자청해 조성한 함양 상림과 그 속에 담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하였다.

창작극에는 호안림을 조성하였던 최치원의 애민사상이 그려져 있다. 창작극 속 등장인물인 작가 상민은 고운 최치원이 상림을 조성한 애민사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스스로 선택한 거죠, 길을. 최치원은 늘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방황한 거죠. 근데 스스로 선택하니까 백성이 보인 겁니다. 언제나 골품에 갇혀서 저 위만, 남 시키는 것만 하였는데 다 버리니까 백성이 보인 겁니다! 시무 10조며 뭐며 중요하지 않았던 거죠! 그건 그냥 글일 뿐이니까! 실천하지 않으면 다 거짓말이니까!”

“외로운 구름…최치원 선생에게 참으로 걸맞은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고운이 바라보았을 풍경을 상상해 봅니다. 물에 잠긴 함양, 그리고 울부짖는 힘없는 백성들…이루어지지도 않을 시무 10조 따위에 집착하였던 자신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권력에 대한 마지막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은 처참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고운 선생은 의연히 다시 일어섭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최치원의 시에서도 ‘상림’을 조성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최치원이 25세이던 881년, 중국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때 최치원이 중국인 오첨에게 보낸 시다.

어려운 때 정좌한 채 장부 못 됨을 한탄하나니

나쁜 세상 만날 걸 어찌하겠소.

모두들 봄 꾀꼬리의 고운 소리만 사랑하고

가을 매 거친 영혼은 싫어들 하오.

세파 속을 헤매면 웃음거리 될 뿐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

장한 뜻 세운들 어디에 말하고

세상사람 상대해서 무엇 하겠소.

특히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란 구절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최치원의 백성에 대한 사랑과 굳은 의지가 상림을 조성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의 작가는 “그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길 위에 주저앉은 게 아니라 자기 길을 가기 위해 일어선 그가 퍼트린 사랑은 숲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타인으로 향할 때, 그 사랑은 강력한 힘을 만들어내고, 타인을 이롭게 함으로써 커진 그 사랑은 다시 외로운 자기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며 최치원의 호안림 조성은 홍수로 고통받던 백성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말한다.

[상림-인공숲에서 자연숲으로 진화하다]

상림은 일상에서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곳이다. 천여 년 전에는 사람이 만든 숲이었지만, 이제는 자연 숲이 되었다. 이러한 숲은 현재까지 이르러 사람을 치유하고 있다. 실개천에 발 담그고, 음악 분수대에서 놀고, 숲 산책로를 걷을 수 있어 온 가족이 여유로울 수 있는 곳이 상림이다.

숲 산책로에는 모래흙이 깔려 산책하기에 더욱 좋아졌다. 맨발로 1㎞ 이상을 산책할 수 있다. 이러한 상림 숲은 자연과 사람이 온몸으로 교감할 수 있는 최고의 힐링 숲이라 할 수 있다.

상림의 사계절은 매우 뚜렷하다. 봄은 신록, 여름엔 연꽃과 녹음이, 가을엔 단풍, 겨울엔 설경이 압권이다. 특히 상림의 가을과 겨울 풍경은 매년 일간지의 사진 기사로 게재될 정도로 아름답다. 무엇보다 연꽃, 단풍과 함께 초가을에 피는 꽃무릇을 빼놓고는 상림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밖숲에 보랏빛 맥문동이 있다면, 경상남도 함양에는 주홍빛 꽃무릇이 있다고 할 만큼 상림의 꽃무릇은 유명하다.

상림은 접근성도 매우 좋다. 대전통영고속도로 함양IC를 나오면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고, 함양시외버스터미널과도 가까워 찾기가 쉽다.

상림에는 볼거리도 많다. 2017년 4월 15일에는 최치원 역사공원이 완공되었다. 함양군에서 조성한 최치원 역사공원은 천년 숲 상림공원을 조성한 최치원의 애민사상을 기리기 위해 관광 자원화한 공간이다. 최치원 역사공원에는 고운기념관과 역사관, 상림관, 고운루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매년 상림에서 최치원문학상 시상식도 개최되고 있다. 또한 함양산삼축제물레방아골축제 또한 상림에서 개최되고 있다.

상림은 이용하기도 편리하다. 상림공원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2018 열린 관광지 공모사업’ 대상 관광지로 최종 선정되었다. 열린 관광지 공모사업은 장애인과 노인,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이 이동할 때 편리한 관광환경 조성을 위해 지난 2015년부터 추진돼 온 사업이다. 함양군은 지난달 위 공모사업에 공모해 무장애 관광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서면·현장심사를 거쳐 이용하기 편리한 관광지로 선정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4.17 내용 수정 [역사와 문화가 함께하는 공간, 상림] 사운정(思雲停) → 사운정(思雲亭) ------------------------------ 모현정(慕賢停) → 모현정(慕賢亭) ------------------------------ 화수정(花樹停) → 화수정(花樹亭)
이용자 의견
김** 사운정(思雲停)
모현정(慕賢停)
화수정(花樹停)
->정 亭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답변
  • 디지털함양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 오탈자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3.20
김** 물레방아골축제 ->천령문화제
  • 답변
  • 디지털함양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 확인 결과, 행사명이 변경된 시점은 2019년 입니다. 해당 내용은 2017년이기에 행사명 변경에 대해서는 이상이 없고, 대신 별칭/이칭으로 해서 검색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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