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40
한자 崔致遠
영어공식명칭 Choi Chiwon
이칭/별칭 고운,해운,문창후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857년연표보기 - 최치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868년 - 최치원, 당나라 유학
활동 시기/일시 874년 - 최치원, 당나라 빈공과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885년 - 최치원,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 지서서 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893년 - 최치원, 천령군 태수 부임
몰년 시기/일시 908년 이후연표보기 - 최치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021년 - 최치원, 문묘에 배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20년 - 최치원, 내사령으로 추증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시
거주|이주지 빙산(氷山)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거주|이주지 청량사(淸涼寺) - 합주(陜州)
거주|이주지 쌍계사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거주|이주지 합포현 별서 - 경상남도 통합창원시 마산합포구
거주|이주지 월영대 - 경상남도 통합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거주|이주지 해인사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치인리 10]
부임|활동지 대산군태수 -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부임|활동지 천령군태수 -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임|활동지 부성군태수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군
사당|배향지 무성서원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칠보면 무성리 500]
사당|배향지 용강서원 - 경상북도 안동시 숲쟁이길 23-3[용상동 446-4]
사당|배향지 서악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서악동 615]
사당|배향지 백연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계림사 - 대구광역시 남구 계명중앙1길 28[대명동 2132-5]
사당|배향지 지산재 - 광주광역시 남구 지산재길 51[양과동 715-1]
성격 학자|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천령군 태수

[정의]

통일신라 말기에 경상남도 함양군수로 임명된 학자이자 문신.

[가계]

최치원(崔致遠)[857~?]은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이며,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857년(신라 문성왕 19) 경주 사량부(沙梁部)[지금의 경상북도 경주 남천(南川) 이북, 서천(西川) 이동, 북천(北川) 이남 일대로 추정]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본피부(本彼部)[지금의 경주 인왕동 일대로 추정]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 최현준(崔賢俊)은 해인사의 대승려이다.

[활동 사항]

최치원은 신라시대 말의 문장가이자 사상가이며, 정치 개혁을 주도한 6두품 출신 학자이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 때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급제했다. 879년(헌강왕 5) 당나라에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유명한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어 문장가로 유명해졌다. 당나라에 머무는 17년 동안 고운(顧雲)과 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과 사귀었다. 885년(헌강왕 11) 29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 지서서 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정강왕 즉위 후 중앙정치에서 밀려나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 경상남도 함양, 경상남도 서산 등의 태수(太守)로 활동하게 된다.

경상남도 함양의 상림(上林)은 최치원이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로 있을 때 조성되었다. 당시 위천(渭川)함양읍의 중앙을 관통하며 흘러 홍수 피해가 심하였기 때문에 강물의 위치를 돌리기 위하여 둑을 쌓았다.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고 대관림(大館林)이라고 이름 지었다. 나중에 큰 홍수가 일어나 둑이 파괴되고 숲이 갈라져서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졌다. 898년(효공왕 2)에 아찬 최치원이 면직되었다고 『동사강목(東史綱目)』에 기록되어 있어 이때쯤 천령군 태수직과 함께 모든 벼슬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893년(진성여왕 9)부터 898년(효공왕 2)까지 최장 5년 동안 천령군 태수로서 대관림 역사(役事)[토목 공사, 건축 공사 등 노동력을 들여서 하는 공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양상림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최치원이 어머니에게 상림에서 뱀을 만나는 바람에 놀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림으로 달려가 “모든 미물은 상림에 들지 말라.”고 외쳤는데 그 뒤로 뱀과 개미 등이 없다고 한다. 함양 학사루(學士樓)최치원과 관련된 장소이다. 천령군 태수로 활동할 당시 최치원이 학사루에서 자주 시를 흝었다고 하여 최치원이 한 벼슬 이름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 지서서 감사’에서 딴 것이다.

894년(신성여왕 8) 「시무10조(始務十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으나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진골 중심 사회 체제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여 경주를 떠나 유랑하다가 은거하였다. 42세 경부터 은둔생활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며, 가야산(伽倻山)[높이 1,430m]에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치원이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 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따르면 908년(효공왕 12)까지는 생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최치원의 유·불·선 통합 사상은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치원의 이름과 저서가 『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 실린 것은 최치원의 문학 자질이 뛰어났음을 보여 준다. 최치원이 귀국길에 오르자 당대 문장으로 이름 높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고 한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사륙집(四六集)』 등의 시문집을 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원필경(桂苑筆耕)』과 『동문선(東文選)』에는 최치원의 글이 남아 있다. 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등 이른바 ‘사산비문(四山碑文)’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도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도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중산복궤집(中山覆櫃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등의 저술이 있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020년(고려 현종 11)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이듬해인 1021년에 문창후(文昌候)라는 시호를 얻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전라북도 정읍 무성서원, 경상북도 경주 서악서원, 경상남도 함양 백연서원, 경상남도 통합창원시 고운영당, 경상북도 해안현(解顔縣)[지금의 대구광역시]의 계림사 등에 제향되었다. 1846년(헌종 12) 지산사(芝山祠)에 최운한(崔雲漢), 최형한(崔亨漢)[?~1504], 정오도(鄭五道)와 함께 배향하였다가 1922년 지산재라 이름을 바꾸고 최치원만을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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