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과 최치원의 문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23
한자 咸陽-崔致遠-文學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한양하

[정의]

통일신라 시대 때 경상남도 함양지역에서 태수를 지냈던 최치원의 행적과 문학세계.

[최치원의 생애]

최치원(崔致遠)[857~?]은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孤雲)이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6두품 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관계하였다고 전한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났는데, 아버지는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격려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는 최치원 스스로가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던 것에서 신흥 가문 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예부시랑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 뒤 876년(헌강왕 2)에 당나라의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가 되었으며, 얼마 후에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 서기를 맡고 있던 최치원이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으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었다. 당나라에서 지은 작품들은 표·장·격(檄)·서(書) 등 1만여 편으로, 귀국 후에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으로 정선되었다.

최치원은 885년에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렀다. 그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문인들과 사귀면서 최치원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은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최치원은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등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바쳤다.

최치원은 귀국 초기 당시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펼치려 하였다. 하지만 진골 귀족의 독점적 신분 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을 깨닫고 외직(外職)으로 나아가길 원하였다. 890년부터 대산군(大山郡)[현재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현재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현재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최치원은 10여 년 동안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직접 목격하였던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시무책이 진성여왕에게 수용되면서 6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다. 하지만 최치원의 정치 개혁안은 계획처럼 실현될 수 없었다.

신라 왕실에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최치원은 40여 세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였다. 즐겨 찾은 곳은 경상북도 경주 남산, 경상남도 합천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 강주(剛州)[현재 경상북도 의성]의 빙산(氷山), 합포현(合浦縣)[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의 별서(別墅) 등이었다. 이 밖에도 동래(東萊) 해운대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최치원의 발자취가 머물렀으며,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갔다고 전한다.

최치원이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최치원이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후세 사람들은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저술로는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1권, 『오언칠언금체시』 1권, 『잡시부』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사륙집(四六集)』 1권의 시문집과 문집 30권 등이 있었다.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이 있었다. 불교와 관련해서는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과 『석이정전』·『석순응전』·『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다. 현전하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산비명』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원문(願文)·찬(讚) 등이 일부 전해진다. 『계월필경』이 당나라 유학 시절의 대표작이라면, 『사산비명』은 귀국한 뒤에 지은 대표작이다. 『사산비명』은 숭엄산 성주사 대랑혜화상,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휘양산 봉엄사 지증대사 등 3명에 대한 비명과 신라 왕실에서 세운 초월산 대숭복사의 비명을 모은 것이다. 대숭복사비를 제외하고는 세 비명을 비문이나 탁본으로 확인할 수 있어 금석문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다. 비문을 통해 신라 시기 불교는 물론,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와 최치원의 유·불·도 삼교 융합 사상까지 엿볼 수 있다. 최치원은 “도(道)란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란 나라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방 사람들이 불교도 받아들이고, 유교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최치원과 학사루]

함양의 학사루[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90호]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있다. 이 누각은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치원[857-?]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자주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조선 시대 관청의 객사 자리였던 현재 함양고등학교 안에 있었는데, 1979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당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92년(숙종 18)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원래 학사루는 객사의 부속 건물로 함양 읍성의 중심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학사루를 제외한 다른 건물들은 모두 소실되었다. 학사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비교적 큰 2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려한 건물은 아니지만 누의 아래와 위, 지붕의 비례가 조화롭고 안정되어 있다. 이는 조선 시대의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누각 건물이다. 김종직[1431-1492]은 일찍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1512]이 쓴 시를 철거한 일이 있다. 이것이 사적 원한으로 발전하여 1498년에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선비들의 시 가운데 제목에 ‘학사루’가 들어간 것이 24제 30수로 전한다. 이 시들에 나타난 최치원은 학자의 모습, 유선(儒仙)의 모습, 시선(詩仙)의 모습, 신선(神仙)의 모습을 띠고 있다. 유선의 모습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고운(顧雲)이 붙여준 것이고, 시선의 모습은 고려 때 이인로가 『파한집』에서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구름을 타고 갔다고 전하고 있다. 학사루는 이처럼 최치원의 입지에 따라 시를 읊을 수 있는 문학의 공간, 강학처(講學處)로서 수학의 공간, 혼돈의 현실 세계를 벗어난 이상의 공간 등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후대의 많은 선비들이 지리산 기행과 탐방에서 최치원의 학사루를 소재로 시를 읊은 것이다.

[최치원 설화]

최치원과 관련한 설화로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당나라의 쌍녀분에서 두 여인을 만난 이야기이지만,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함양읍 운림리상림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함양의 상림은 신라 말에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부임하였을 때 대관림을 조성하면서 만들어졌다. 최치원이 강을 돌리고 숲을 조성하면서 생긴 이 일화는 최치원의 깊은 효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치원은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제방을 쌓고 대관림에 나무를 심게 하였다. 숲이 조성되자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최치원은 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함양에 와 있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외출 시에도 반드시 아뢰어 근심 걱정이 없도록 하였다. 하루는 최치원의 어머니가 홀로 바람을 쏘이고, 산책을 할 겸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대관림에 나갔다. 그리고 풀숲에 앉아 쉬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놀란 이야기를 하였고, 이야기를 들은 최치원은 어머니께 송구함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주문을 쓴 종이를 들고 대관림으로 가서 숲에 주문을 외우고, 향후 이 숲에는 뱀이나 개미 같은 양서류와 해충은 일절 없어지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하였다. 그 후로는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과 주문 때문에 해충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최치원이 함양을 떠나면서 이 숲에 뱀이나 개미가 나타났고, 숲속에 산죽이 침범하면 최치원이 죽은 줄 알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설화에는 최치원의 목민관으로서의 면모, 지극한 효심, 비범한 주술력 등이 잘 반영되고 있다. 첫째는 목민관으로서 최치원은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리고 해결하려는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재해 등의 수해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고 제방을 쌓았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최치원은 과거 백성들이 자연재해를 당하고 받은 고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최치원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전국에 최치원의 발자취가 남은 곳이 40여 곳이 있는데, 매년 홍수로 백성들이 물난리를 겪자 물길을 돌려 제방과 둑을 쌓아 조성한 상림[당시 대관림] 숲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치원 생애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는 지극한 효심이다. 이 부분은 다른 설화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다. 상림 설화에서는 최치원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부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유교적 효의 가치관에 따라 출입 시에 알리고, 근심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일상에서 효를 실천하는 반듯한 인물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비범한 주술력으로 주문을 외워 해충을 없앴다는 것이다. 숲에 벌레와 파충류가 사는 건 당연한 이치이지만, 주술로 벌레와 파충류를 없앴다는 것은 최치원의 비범한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치원과 관련한 설화들을 보면 대부분 도교적인 주술이나 기이한 일들이 소재가 된다. 신라 말에 육두품의 신분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최치원은 말년에 해인사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 후일을 알 수 없는 종적과 함께 유, 불, 도를 겸한 최치원의 학식이 주술과 관련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여 볼 때, 최치원의 모습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문사이자 효성스러운 인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함양과 최치원, 현재적 의의]

최치원의 인물됨은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상림을 중심으로 한 전설로 보아, 지극한 효성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빼어난 문인 자질을 갖췄기에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 시대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 관리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하였다. 그리고 다시 신라로 돌아온 후에도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남겼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최치원의 뛰어난 재능과 면모를 기리는 의미에서 ‘최치원문학상’이 제정되어 전국 공모를 추진하고 있다. ‘최치원문학상’은 최치원의 애민정신과 선비의 고장 함양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것으로, 기존에 있던 ‘지리산문학상’과 분리하여 2017년 3,000만 원의 상금을 건 전국 규모의 문학행사로 기획되었다.

당시 군수는 “최치원 선생은 대문호가이자 인문 사상의 개척자로 군에서 ‘최치원문학상’을 제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최치원문학상을 통해 최치원의 애민정신을 널리 알리고, 함양을 알릴 수 있는 명성 높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함양 상림에 최치원 역사공원을 준공하기로 하였다는 소식도 전하였다. 이처럼 최치원은 문학이나 전설을 뛰어넘어 다채로운 콘텐츠로 재생산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할 일은 최치원 역사공원의 건립이다. 2018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문화예술회관 뒤편 1만 8,521㎡의 면적에 들어섰다. 최치원 역사공원은 최치원의 덕과 학문,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기념관, 사료관, 전시관 등을 갖추고 있다. 고운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역사관, 우측에는 상림관을 두었으며, 정면에는 고운기념관이 있다. 역사관은 최치원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누어 최치원의 일대기와 문학, 사상 등을 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상림관은 ‘함양 상림’조성부터 설화, 현재 자생하는 수목, 동식물을 체험할 수 있다. 고운기념관에는 최치원의 영정을, 앞마당에는 동상과 신도비 모형을 설치하여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최치원을 추모하는 제향행사가 4월 15일에 최치원 역사공원 고운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는 (사)성균관유도회 함양지부 부관으로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전국 경주최씨 종친회와 지역 유림 등 1,200여 명이 참석한 큰 행사로 치러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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