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28
한자 荒山大捷
영어공식명칭 Battle of Huangshan
이칭/별칭 운봉전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380년 8월 - 전라도·충청도·경상도 일대에 왜구가 진포(鎭浦)에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서 약탈과 방화 자행
종결 시기/일시 1380년 9월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황산에서 왜군에 대승
발단 시기/일시 1378년 5월 - 지리산 방면으로 침입한 왜구를 이성계 등이 토벌시킴
종결 장소 황산대첩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황산
성격 사건·사고와 사회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성계|변안열|왕복명|우인열|도길부|박임종|홍인계|임성미|이원계

[정의]

고려 후기에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의 경계 접점인 황산에서 이성계 등이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개설]

이성계는 함양군의 사근역함양성을 공략하고 서쪽으로 진격했던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황산전투에서 사살하여 적의 사기를 무너뜨린 후 맹공격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황산대첩은 왜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으로, 이후부터 왜구의 기세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황산이 현재의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하지만 고려시대 황산대첩은 함양군의 전투와 연속선상에서 진행된 것이다.

[역사적 배경]

황산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아영면·인월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고려 후기 황산대첩의 현장이다. 고려시대 황산의 소재지인 운봉현(雲峯縣)은 757년(경덕왕 16) 군현개편 때에는 함양군 지역인 천령군(天嶺郡)의 영현(領縣)이었다가 고려에 들어와서 남원부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시대 운봉현에는 동쪽으로 16리 지점에 황산과 인월역(印月驛)이 자리잡고 있었고, 황산으로부터 동쪽 5리[약 2㎞] 지점에 요해처(要害處)인 팔량현(八良峴)이 있었는데 팔량현이 함양군과의 경계 지점이다.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우왕 2)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했으나, 1380년(우왕 6) 8월에 가장 큰 규모로 침입해 왔다. 왜구는 500척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진포(鎭浦)로 침입하여 대부대를 상륙시키고, 여러 고을로 흩어져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시체는 산과 들을 덮었고 약탈한 곡식을 운반해 갈 때 흘린 것이 1척[약 30㎝]가량이나 쌓였다고 할 정도로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이 출동하여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해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겨우 330여 명의 왜구가 충청북도 옥천(沃川)군 쪽으로 도망하여 앞서 상륙한 왜구와 합류하고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경과]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합세한 왜구는 고려군의 추격을 피하여 도주하면서 영동현(永同縣)을 불태우고 황간(黃澗)을 거쳐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진입하였다. 왜구는 경상북도 상주시의 속읍이었던 중모(中牟)·화령(化寧)·공성(功城)·청리(靑利) 등의 고을을 침탈하고, 상주(尙州)와 선산(善山) 등을 차례로 불태운 후에 경산부(京山府)를 거쳐 마침내 함양군으로 진출하여 사근역(沙斤驛)을 장악하였다. 왜구가 함양군을 침입하자 원수 배극렴(裴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湧奇)·오언(吳彥)·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裴彥)·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 등이 왜구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황산전투에서 원수 박수경과 배언 그리고 병사 50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배하였고, 함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함양성을 함락시킨 왜구는 이동 방향을 운봉쪽으로 돌렸다. 1380년 9월에 왜구는 남원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퇴각하면서 운봉현을 불태우고 인월역에 주둔하였다. 인월역에서 왜구는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인 후 북쪽으로 진격할 것이다”라고 호언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고, 변안열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왕복명(王福命)·우인열(禹仁烈)·도길부(都吉敷)·박임종(朴林宗)·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결과]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 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과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고,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시냇물이 붉게 물들어 6~7일간이나 색깔이 변하지 않아 마실 수 없을 정도였으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었고, 병장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처음에는 적군이 고려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70여 명만이 살아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의의와 평가]

황산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왜구는 이후부터 그 활동 양상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에 이르렀다. 왜구는 침탈 대상 지역을 한반도 서부 지역에서 동부 지역으로 전환시키는 추세를 보였으며, 침입 규모나 횟수도 감소되었다. 이처럼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과 함께 왜구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며,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고려는 왜구대책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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