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33
한자 沙斤山城戰鬪
영어공식명칭 Battle of Sageun Sans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산 60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380년 8월연표보기 - 사근산성 전투 발생
발생|시작 장소 사근산성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산60 지도보기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배극렴|김용휘|지용기|오언|정지|박수경|배언|도흥|하을지

[정의]

고려 후기에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사근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왜구 토벌 전투.

[개설]

1380년(우왕 6) 8월 왜구는 함양군의 사근역(沙斤驛)에 주둔하면서 총공세를 펼쳤다. 이때에 함양군으로 들어온 왜구는 경상도 연해지역으로 상륙한 왜구가 아니라, 1380년 8월 금강 하구 진포 전투에서 패배하여 내륙으로 도주 중이었던 왜구 잔당이었다. 원수 배극렴(裴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湧奇)·오언(吳彥)·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裴彥)·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 등이 왜구에 맞서 반격했으나,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해 병사 50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배하였고, 함양군은 마침내 도륙되고 말았다.

[역사적 배경]

1380년 8월에 왜구는 금강 하구의 진포(鎭浦)에 500척 규모로 침입하여, 충청도·전라도의 연안지방을 약탈하였다. 왜구에 맞서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은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의 선박을 대부분 소각하였다. 진포 전투에서 왜구의 선박 500척이 거의 불탔지만, 승선 왜구의 상당수가 탈출하여 내륙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도주했던 왜구는 고려군의 추격을 피하여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이동하였고 미리 와 있던 왜구와 합세한 후 영동현(永同縣)을 불태우고 황간(黃澗)을 거쳐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진입하였다. 왜구는 경상북도 상주시의 속읍이었던 중모(中牟)·화령(化寧)·공성(功城)·청리(靑利) 등을 침탈하고, 경상북도 상주시와 경상북도 선산읍 등을 차례로 불태운 후에 경산부(京山府)를 거쳐 마침내 함양군으로 진출하여 사근역에 주둔하였다.

[경과]

왜구가 함양군 일대를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원수 배극렴(裴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湧奇)·오언(吳彥)·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裴彥)·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 등을 급파하여 왜구를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사근산성 전투에서 원수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해 병사 50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배하였고, 함양성도 함락되었다. 전사자의 핏빛으로 냇물이 온통 붉어서 혈계(血溪)라 부를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다. 뒷날 이첨(李詹)은 시에서 “이때에 우리 군사가 왜놈에게 패하여, 피를 함양 언덕의 풀에 뿌렸네. 양부의 원수가 진 앞에서 죽었으니, 하찮은 군사들이야 신명 보전도 어려웠으리라. 슬픈 피리 두어 곡조에 장부도 눈물 지으며, 늙기 전에 국치(國恥)를 씻으리라 맹세하였네”라고 하였다.

[결과]

함양군은 왜구의 침입으로 대규모의 인명과 경제적 피해를 입었고, 지역사회의 변동을 초래하는 배경이 되었다. 함양성은 왜구에게 함락되면서 행정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선시대 읍성이 있었던 문필봉 밑에 토성을 쌓아 치소(治所)를 옮겼다.

[의의와 평가]

사근산성 전투는 고려 후기 함양군에서 왜구와 싸웠던 대표적인 전투이다. 조정에서 판견된 관군들이 격파당하고 함양읍성이 함락당하면서 함양군은 사회적·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당하였고, 민심의 불안과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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