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왜구의 함양 침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31
한자 高麗後期倭寇-咸陽侵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380년 8월 - 왜구가 함양 사근내역에 주둔해 함양성 함락
발단 시기/일시 1379년 9월 - 왜구가 반성현을 침입하여 확산 정상에 목책을 세움
발단 시기/일시 1379년 9월 - 왜구가 산음·진주·사주를 차례로 공격하면서 함양까지 침입해 약탈에 성공
전개 시기/일시 1384년 11월 - 왜구가 다시 함양을 침입
전개 시기/일시 1389년 7월 - 왜구가 함양과 진주를 침탈
성격 왜구 침입
관련 인물/단체 배극렴|김용휘|지용기|오언|정지|박수경|배언|도흥|하을지

[정의]

고려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에 왜구가 침입하여 약탈한 사건.

[개설]

왜구는 대략 13~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인 해적 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왜구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당시 일본이 남북조 쟁난기에 처하여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는 가운데 무사들의 토지 쟁탈, 농지를 잃은 농민의 빈곤화, 경제적으로 무력해진 하급무사의 양산, 기근에 허덕이고 있던 쓰시마[對馬]·이키[壹岐]·마쯔우라[松逋] 지방의 열악한 입지조건 등 때문이었다. 왜구들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생활 필수품을 얻기 위하여 고려를 침입하였다.

[역사적 배경]

고려 고종 때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왜구는 충정왕 때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여 이후 서남해 연안지역은 물론 수도 개경까지 위협함으로써 국가 위기상황을 조성하였다. 고려 후기 1223~1392년(고종 10~공양왕 4)까지 169년간, 왜구의 침입 횟수는 모두 529회이다. 왜구의 침입을 가장 많이 당했던 시기는 공민왕과 우왕 때였다. 공민왕 때의 115회와 우왕 때의 378회를 합치면 493회로, 이는 전체 침입 횟수의 93%에 해당되는 것이다.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이 수천 명의 인원으로 침범할 때도 있었다. 왜구의 침입 목적은 재화의 약탈이었으므로 곡식을 저장해 둔 관창(官倉)을 습격하고 해상에서 조운선을 공격하여 양곡을 탈취하거나 인명을 살상하였다.

[경과]

함양군에 대한 왜구의 직접 침입은 연해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늦은 1379년(우왕 5) 9월부터이다. 1379년 9월 왜구는 반성현(班城縣)으로 침입하여 확산(確山) 정상에 목책을 세워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우인렬(禹仁烈)·박수경(朴修敬)·오언(吳彥) 등이 목책을 포위 공격하는 활약으로 왜구 34급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달 왜구는 다시 단계(丹溪)·거창(居昌)·야로(冶爐) 등지를 차례로 침입하고,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지역인 가수현(嘉樹縣)까지 진출하였다.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김광부(金光富)가 가수현에서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사망했고, 해인사에 보관 중이던 『고려왕조실록』을 비롯해 각종 서책의 판본을 선산 소재의 득익사(得益寺)로 옮겨야 될 정도 왜구의 기세는 치열했다. 왜구는 마침내 산음(山陰)·진주·사주(泗州)를 차례로 공격하면서 함양군까지 침입해 약탈하였다.

이듬해인 1380년(우왕 6) 8월에 왜구는 함양군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면서 총공세를 펼쳤다. 함양군으로 들어온 왜구는 경상도 연해지역으로 상륙한 왜구가 아니라 8월 금강하류 진포(鎭浦) 전투에서 최무선의 활약으로 패배하여 내륙으로 도주하고 있던 왜구 잔당이었다. 진포 전투에서 왜구의 선박 500척이 거의 불탔지만, 승선 왜구의 상당수는 탈출하여 내륙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내륙으로 도주한 왜구는 고려군의 추격을 피하여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이동하였고 충청북도 옥천군에 미리 들어와 있던 왜구와 합세한 후 영동현(永同縣)을 불태우고 황간(黃澗)을 거쳐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진입하였다. 왜구는 경상북도 상주시의 속읍이었던 중모(中牟)·화령(化寧)·공성(功城)·청리(靑利) 등의 고을을 침탈하고, 상주시와 선산 등을 차례로 불태운 후에 경산부(京山府)를 거쳐 마침내 함양군으로 진출하여 사근내역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왜구가 함양군을 침입하자 원수 배극렴(裴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湧奇)·오언(吳彥)·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裴彥)·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 등이 이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원수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해 병사 50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배하였고 함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1384년(우왕 10) 11월에 왜구가 다시 함양군을 침입했다. 1384년에도 왜구는 고려의 내륙 여러 곳을 침탈했지만 왜구 집단의 규모가 소규모였고, 고려군 측의 효과적인 토벌작전으로 크게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이때 함양군을 침입한 왜구도 곧 토벌되어, 도순문사 윤가관(尹可觀)과 진주목사 박자안(朴子安)이 왜구 80여 급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1389년(창왕 원년) 7월에도 왜구가 함양군과 진주시를 침탈했다. 왜구 침입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지휘체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절제사(節制使) 김상(金賞)이 왜구를 토벌하다가 패배했는데, 관군이 구원하지 않자 김상이 말을 버리고 도망치다가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체복별감(體覆別監) 이옹(李雍)을 보내어 사실 조사를 벌였으며, 부진무(副鎭撫) 하치동(河致東)과 배리(陪吏) 파두(波豆) 등이 이전에 이빈(李贇)이 죽었을 때에도 구원하지 않았던 사실을 밝혀 내어 그들을 참수하였다. 또 도진무(都鎭撫) 하취동(河就東) 등 13인은 각각 장형 100대로 처벌하였다.

[결과]

함양군 지역사회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명 살상·촌락 파괴·관아 소실·농토의 황폐화 등 인명과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아울러 인구이동 등을 불러와 지역사회의 변동을 초래하는 배경이 되었다. 함양성이 함락되는 등 함양군 행정의 중심지가 큰 타격을 입어 행정기능을 상실함으로써 치소(治所)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읍성이 있었던 문필봉 밑에 토성을 쌓은 후에 관아를 옮겨 새로운 치소로 삼았다.

[의의와 평가]

고려 후기 왜구 침입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피해를 가져왔다. 국고 수입의 원천인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과 조창이 약탈 대상이 됨으로써 국가 재정을 파탄 상태로 몰고 갔다. 조세를 내륙으로 운반하려는 육지 운송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군량미의 부족까지 초래하는 등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정치적으로도 개경의 계엄령에 따른 민심의 동요, 천도론의 대두로 인한 조정 상하의 불안감, 민가의 약탈 등은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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