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06
한자 高麗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80년연표보기 - 황산대첩

[정의]

고려시대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경상남도 함양군은 고려시대에 함성군(含城郡)이라고도 불렸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속함군(速含郡)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의 관제 개편 때 천령군(天嶺郡)으로 개칭하고, 운봉현(雲峰縣)과 이안현의 두 고을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행정구조]

경상남도 함양군과 이안현으로 구성된 고려시대 함양 지역은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 지역인 합주(陜州)의 속읍으로 편제되었다. 신라 때까지 함양군은 천령군이라는 이름으로 운봉현과 이안현 두 고을을 거느리고 있었던 큰 고을이었다. 고려 초까지 함양 고을의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어 995년(성종 14)에 10도제를 시행하면서 허주(許州)로 설정되었고, 도단련사(都團鍊使)가 파견되었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당시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몇 안 되는 고을 가운데 하나였으며, 유수-절도사-도호부사 다음의 지위를 갖는 도단련사가 파견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1012년(현종 3)에 전국을 5도호(都護) 75도안무사(安撫使) 체제로 개편하면서 허주는 폐지되고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합주(陜州)의 속읍으로 만들었다.

한편 이안현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마리현(馬利縣)으로 치읍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의 관제 개편 때에 이안현으로 개칭하여 천령군의 영현(領縣)으로 소속시켰다. 고려 건국 후에도 함양의 영현으로 계속 남아 있다가 1012년에 함양이 합주의 속읍으로 전락하고, 1018년(현종 9)의 군현 개편 때에 이안현도 합주의 속읍으로 편제되었다.

고려시대 함양군과 이안현에는 특수한 행정 구역으로서 향·소·부곡 등 부곡제 영역이 분포되어 있었다. 공안부곡(功安部曲)[동남쪽 6㎞], 마천소(馬川所)[남쪽 12㎞], 의탄소(義呑所)[남쪽 12㎞], 가을산소(加乙山所) 등이 있다. 교통시설로는 사근역(沙斤驛)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구와 경제]

고려시대 함양의 인구와 경제 규모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등 지리서를 통해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 경상남도 함양군의 인구는 428호에 3,829명(남 1,948명, 여 1,981명)으로 집계된다. 경지면적은 2,473결로, 논이 약간 적은 편이었다.

고려시대 함양 지역도 조세와 역·공물 부담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인 함양군과 이안현의 주민들도 다른 지역 주민과 마찬가지로 군역을 부담하였는데, 주현군(州縣軍)에 포함되어 군역을 부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주현군 조직에서 함양군과 이안현은 합주도(陜州道)에 소속되었다. 합주도 주현군의 종류와 인원수는 보승군(保勝軍)이 373명, 정용군(精勇軍)이 229명, 1품군(一品軍)이 448명이었다.

[고려 후기 함양 지역사회의 변화]

고려 후기에는 속읍이었던 경상남도 함양군과 이안현에도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함양 지역에 다시 지방관이 파견되는 것은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파견되면서부터이다. 비록 군수나 현령 등 공식 지방관이 아니라 임시 지방관이기는 하지만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합주의 권역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고을을 운영할 수 있었다.

무인 집권기부터 시작된 농민항쟁과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경상남도 함양군에도 영향을 미쳐 지역사회의 변화를 불러오고 있었다. 먼저 무인 집권기 농민항쟁은 함양 지역에서 직접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인근의 진주와 합주 등지에서 발생하고 있어서 함양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200년(신종 3)에 합주의 노올부곡(奴兀部曲)에서 광명(光明)·계발(計勃)이 부곡민과 인근의 유망농민층을 규합하여 농민항쟁을 일으키자, 곧 진주로 파급되어 가혹한 수탈대상이었던 진주의 공사노예들이 봉기하였다. 관료들에게 직접 수탈을 가하는 주리(州吏)를 죽이고, 관료의 집 50여 채를 불태워버렸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다시 한번 함양 지역사회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 대한 왜구의 직접 침입은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인 1379년(우왕 5)부터이다. 1379년 9월에 왜구는 산음(山陰)·진주·사주(泗州)를 차례로 침입한 후 함양까지 침입해 왔다. 이듬해 1380년 8월 왜구는 함양 사근역(沙斤驛)에 주둔하면서 총공세를 펼쳤다. 이때 왜구의 침탈로 원수 박수경(朴修敬)과 배언(裴彥)을 비롯한 병사 500여 명이 전사하고 함양성이 함락되는 등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이 커서 지역사회의 기반이 무너지게 되었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경상남도 함양 지역 재지 세력 가운데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인물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경상남도 함양군의 재지 세력인 토성(土姓)으로 여(呂)·오(吳)·서(徐)·박(朴)·조(曺)씨 등이 있었고, 이안현의 토성으로 조(曺)·임(林)·김(金)·표(表)·하(河)씨 등이 있었다. 이들 성씨 가운데 함양박씨·함양오씨·함양여씨가 관료 배출을 주도하였다. 함양박씨 인물로는 위위윤을 지낸 박지빈(朴之彬)의 세 아들 박장(朴莊)·박리(朴理)·박계원(朴季元)이 과거 합격자였고, 박장의 아들 박충좌(朴忠佐) 또한 급제하여 충숙왕대에 판삼사사를 지냈다. 함양오씨 인물로는 오광휘(吳光輝)가 명종 때 명주적(溟州賊)을 토벌하여 함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상서좌복야를 지냈다. 함양여씨는 고려 말에 여칭(呂稱)이 관료로 진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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