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D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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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경윤 |
❚ 이웃집 총각과 결혼한 사연
‘울고 들어왔다가 울고 나가는 동네’가 육곡리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면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버스조차 잘 다니지 않아 사는 게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오지마을과 다르지 않으니 처음 이사 들어온 사람은 힘들어서 울고, 전출할 때엔 마을 사람들에게 정이 들어 서운한 맘에 울고 나간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송옥희(79) 씨는 3남매의 맏딸로 육곡리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지금까지 80평생을 살아왔다. 여자들은 시집가면 친정동네를 떠나지만, 다행히 이웃에 살던 세 살 연상의 강평권 씨를 만나 결혼했고, 7남매를 낳아 키우며 육곡리 토박이로 살아왔다. 이웃집과 사돈지간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어머니의 애틋한 딸 사랑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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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옥희, 강평권
그 시절에는 집안 어른이 짝을 지어주면 좋든 싫든 무조건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송옥희 씨는 훗날 남편이 되는 이웃집 총각 강평권 씨가 마을에서 ‘호인(好人)’이라고 이름이 났던 데다가 자주 얼굴을 마주쳐왔던지라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수년전부터 어머니와 이웃집 아주머니는 자주 왕래하며 서로의 자식을 자식의 배우자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것이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이웃집 아주머니 즉 시어머니가 될 분의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어머니보다는 남편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시어머니와 한평생 살 거 아니다. 남편만 좋은 사람이면 되는 거지. 남편 하나만 보고 살아. 그리고 우리가 옆집에 사는데 함부로 하겠니. 딸자식 멀리 여의면 이웃사촌보다 못해”
이러한 말씀 속에서 딸을 옆에 두고 싶어 하시는 마음도 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양가 부모님의 허락 하에 결혼을 하고 신혼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가야곡면은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인데 그중에서도 면소재지이자 집성촌이었던 육곡리에서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마을이 전부 불에 타기도 하고 군인들이 무차별로 총을 쏴 대서 죄 없는 주민들이 죽어나갔다.
이 와중에 송옥희 씨의 시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고, 며칠 후에는 친정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이웃으로 함께 살자던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그 난리에도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위패를 소중하게 모셨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날이 밝으면 집으로 돌아와 밥을 해 먹고 집에 있다가 저녁에는 모두 이웃 마을 산 속으로 피난을 가면서도 저녁마다 혼백함을 장독대 밑에 숨겼다가 아침이면 다시 위패를 모셔놓고 3년을 하루처럼 밥을 해 올렸다.
❚ 제2의 인생- 우체국을 세우다.
결혼하자마자 전쟁이 나고 매년 반복되는 힘든 농사일에 일곱 남매를 낳고 키우는 동안 젊은 시절은 빠르게 지나버렸다. 남들은 홀시어머니 모시랴 일곱 남매 키우랴 고생했겠다고 하지만, 시어머니와 함께 아이들을 키워낸 셈이었다.
결혼하고 16여 년 쯤이 지났을 무렵 전라도에 살고 있던 이종 형부가 ‘별정우체국’이 생기니 한번 해 볼 생각이 없냐며 제안을 했다. 별정우체국은 지금의 우체국으로 과거에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국가의 부담으로 우체국을 설치하지 못하는 곳에 그 지역 유지 등이 자비를 부담하여 설치를 하면 직원의 보수 등 운영자금을 국가에서 보조하는 것이다. 전국에서 별정우체국이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면서 너도나도 세우려고 했다.
처음 육곡리에 별정우체국을 지으려 했을 때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특히 시어머니의 반대는 극에 달했다. 한평생 농사짓고 거기에서 얻은 걸로 먹고 사는 게 전부였던 시어머니에게 논을 팔아 우체국을 지으려고 한다는 말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농사짓고 살면 등 따숩고, 배고플 걱정이 없을 텐데 지집년이 잘못 들어와 요물을 떨어서 집안이 망하네.”
그러나 젊은 송옥희 씨의 생각은 달랐다. 점점 시대가 발전하고 있고, 또한 우체국이라도 세워놓으면 누군가가 “너희 아버지 뭐하시니” 하고 물어보면 “아버지 농사지으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우체국장이요”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아이들에게 더 자랑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를 회상하며 그녀는 말했다.
“아마 TV나 광고에 나왔으면 우리가 못했을 거야. 부자들이 먼저 하려고 했지. 이거나 했으니까 이렇게 먹고 사는 거지.”
시어머니는 반대를 했지만 남편인 강평권 씨는 아내의 뜻을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그리하여 부부가 함께 별정우체국을 짓기로 계획하고 마을 안쪽에 있던 집을 우체국을 지을 자리로 이사해 관사 형태로 집을 지었다.
1963년 12월 27일에 신축 우체국이 개국했다. 처음에는 차석(사무 보는 사람) 1명, 국장(남편) 1명, 집배원 3명, 전화 돌려주는 사람 1명으로 일을 시작했으나 직원은 12명까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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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옥희, 강평권
직원은 남편과 송옥희 씨가 상의해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채용했다. 특별한 일자리 없이 이곳저곳 떠돌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막노동을 하는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에 그를 집배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가 아닌 중학교 졸업자인 경우도 있었다. 서류를 확인한 게 아니라 동네사람들 말만 들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까지도 함께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육곡리에 우체국이 생긴 사실은 주변지역에 큰 화젯거리가 됐다. 이제까지 양촌면의 우체국까지 걸어가서 일을 보고 다시 걸어오면 한나절이 다 지나버렸기 때문에 육곡리 우체국에 가야곡면 사람들이 모두 반가워했던 것이다. 우체국이 생기고 1년 후인 1964년 전화 교환대를 설치하고, 전신 업무 개시하였다.
송옥희 씨 부부의 우체국으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훨씬 편리해졌다. 요즘처럼 각 집에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우편물뿐만 아니라 전화 연결 업무로도 우체국은 쉴 새 없이 바빴다. 그렇지만 일은 많아도 한 달에 손에 들어오는 돈은 3,000원 뿐이었으니, 그 무렵 이장이 군에서 받는 한 달 판공비 정도에 불과했다. 열 명의 식구에게는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송옥희 씨는 별정우체국을 세울 때 조금 남겨둔 땅에 농사를 짓고 살림을 꾸려나갔다. 국장인 남편이 바쁠 때에는 혼자 농사도 지으며 내조를 하고,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7남매를 키우는 등 하루도 쉴 틈 없이 십 수 년을 살았다. 우체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면서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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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옥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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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옥희 가족
❚ 한쪽 날개를 잃다.
위암 선고를 받은 남편이 끝내 1986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남편은 평소 ‘동네 머슴’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슨 일이든지 맡아서 하고 글 솜씨가 좋아서 마을의 산신제나 향교 제향 때에 대표로 축문을 쓰는 등 마을의 대소사를 주관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마을의 유지였던 양조장집의 사장과 절친하게 지내며 합심을 해서 육곡리 마을에 전화를 들여 놓았던 일은 지금까지 노인들이 추억하는 일이기도 했다.
송옥희(79) 씨의 오빠인 송종섭(84) 씨는 강평권 씨 덕분에 마을에 전화를 들여놓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당시에는 전화 설치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우체국에 전화를 놔줬어, 다른 동네는 그 전에 우체국이 있었어도 전화를 못 놨는데 육곡리는 어떻게 우체국이 생기자마자 전화를 설치하게 되는지 모르겠어.”
이 이야기는 당시에 전화란 웬만한 부유층이나 유지가 아니면 끌어 쓸 수 없는 것이었고, 공공전화라 해도 마을 순서가 있기 때문에 차례보다 먼저 받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평구 씨가 우체국을 세우고, 양조장 주인이 전화국의 고위층을 알고 있던 덕분에 다른 마을보다 전화가 빨리 개통 되었던 것이다.
송옥희 씨는 궂은일에도 솔선수범하면서 자상했던 남편 모습을 하루도 잊을 수 없다. 평생 싫은 소리 한번 한 적이 없고, 술 취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였다.
❚ 후회 없는 삶
송옥희 씨는 홀로 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체국 뒤에 자리한 집에서 우체국을 친구 삼아 남편삼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다. 20년 전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에 한동안은 집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동네 구석구석 남편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주민들은 얼굴만 마주치면 괜찮은가 하며 안쓰러워 하니 더욱 슬픔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손주들을 볼 때면 더욱 남편이 생각난다고 하며 송옥희 씨는 말했다.
“남편과 같이 있으면 당당할 텐데, 날갯죽지가 부러진 느낌이야. 지금까지 살았으면 증손주까지 보고 좋아 하셨을 텐데…. 그 양반이 외아들로 살아서 자식 욕심이 많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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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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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옥희 칠순잔치
그때부터 큰아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혼자 사는 어머니가 외로울까봐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 사람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일을 돕게 하고 제 손으로 여섯 동생을 모두 결혼시켰다. 또한 1988년에는 우체국이 너무 허술해 보인다며 장남이 직접 나서서 다시 지어 1989년 5월 27일 현청사로 개축한 것이 지금의 건물이다. 처음에는 장남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우체국 일을 맡았다가 다른 일과 병행하기 어려워 그만두고 사람을 뽑아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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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곡 우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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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구 표창장
그런 아들을 보며 송옥희 씨는 흐뭇해하며 말한다.
“말썽하나 안 부리고 커줘서 참 고맙지, 동네사람들이 우리 집 자손들이 잘된다고 부러워한다니까.”
그녀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동네에 사는 자신의 인생을 다행으로 여기며, 또한 남편과 함께 우체국을 세우고 여기에 기대어 살아온 삶에 후회가 없다.
[정보 제공자]
송옥희(1930년생, 육곡1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