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과 물레방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21
한자 燕巖 朴趾源
영어공식명칭 Yeonam Bak Jiwon-watermill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광철

[정의]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안의현의 지방행정, 그리고 물레방아의 제작과 보급 등을 재조명해 본다.

[개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1786년(정조 10) 선공감 감역을 시작으로 평시서 주부, 사복시 주부, 한성부 판관을 역임했다. 1792년(정조 16) 12월부터 3년 남짓 안의현감을 지내고, 다시 중앙관직으로 나가 1796년 한 해 동안 제용감주부, 의릉령(懿陵令)을 역임했다. 1797년(정조 21) 7월부터 3년간 면천군수를 맡은 후, 1800년(정조 24) 양양부사(襄陽府使)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80년(정조 4) 6월 25일~10월 27일에는 4개월간 북경과 열하(熱河)를 여행하고 돌아와 견문한 내용을 정리하여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펴냈다. 또한 정조가 농업을 장려하기 위한 저술을 구한다는 윤음(綸音)[임금이 내리는 말]을 내리자, 1799년 3월 10일에는 안의현감과 면천군수 시절의 농사 경험을 반영하여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올렸다. 박지원은 이와 같은 과학 농서의 보급을 통해 중농학과 실시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사상을 몸소 실천하였다. 안의현감 시절에 물레방아, 풍구 등 선진 농기구를 제작하여 시험한 것 또한, 농업기술의 개량을 통해 민생을 윤택하게 하려 하였던 박지원의 애민정신을 잘 보여준다.

[박지원의 생애]

박지원은 본관이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이며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에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서울 중구 순화동·의주로 2가에 걸쳐 있던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를 지낸 박필균(朴弼均)[1685~1760]이고,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이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그를 양육하였다.

박지원은 1752년(영조 28)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한 후, 장인 이보천과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의 문하에서 학문과 글을 배웠다. 장인 이보천에게서는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이양천에게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가르침 받아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다. 처남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그러나 1759년(영조 35)에는 모친상을 당하고, 이듬해에는 할아버지가 박필균의 상을 당하며 생활이 많이 어려워졌다. 1765년(영조 41)에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이후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에는 백탑(白塔)[지금의 탑골공원]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때를 전후해서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정조의 즉위 후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으면서 벽파(僻派)였던 박지원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1778년(정조 2)에 박지원은 세상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이해 6월 25일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1725~1790]이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축하 사절로 북경을 갈 때 함께 수행하게 된다.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10월 27일에 돌아와,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열하일기』이다. 1786년(정조 10)에는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다. 1789년(정조 13)에는 평시서 주부·사복시 주부를 역임하고, 1791년(정조 15)에는 한성부 판관이 되었다. 1년 뒤에 지방관으로 나가, 1792년(정조 16) 12월부터 3년 남짓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내고, 다시 중앙관직으로 나가 1796년 한 해 동안 제용감주부·의릉령을 역임했다. 1797년(정조 21) 7월부터는 3년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맡은 후, 양양부사(襄陽府使, 정조 24)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박지원의 여러 저술은 『열하일기』와 함께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 보인 작업이었다.

[안의현감 시절의 박지원]

안의현(安義縣)은 본래 안음현(安陰縣)으로, 1767년(영조 43)에 안의현으로 개칭되었다. 안음현이 성립하는 것은 1417년(태종 17)의 일로, 고려 시대 합천의 속현이었던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을 통합하여 안음현이라 하였다. 안음현은 1728년(영조 4) 3월 말에 발생한 정희량(鄭希亮) 난의 근거지가 되면서, 난 진압 후 고을이 혁파되어 함양과 거창 두 곳으로 분리되어 속하게 되었다. 9년이 지나 1736년(영조 12)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의 건의에 따라 안음현으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 인근 산음(山陰)에서 7세 아이가 아들을 낳는 해괴한 일이 발생한다. 그 때문에 음자를 빼서 산음을 산청(山淸)으로 하고, 안음현을 안의현으로 고쳤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안의현에는 현내면(縣內面) 등 12개 면과 115개의 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戶)수는 4,003호이고, 인구는 1만 6,602명[남 8,091명, 여 8,511명]이었다. 경지면적[논밭]은 2,497결 50부 9속인데, 이 중 밭이 920결 92부 4속이었다. 당시 경상남도 함양군의 호수가 5,000호, 인구 2만 4,198명인 것에 비하면 규모가 조금 적은 편이었지만, 상당 정도 읍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1792년(정조 16) 12월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쓴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에서 ‘나는 화림(花林)[안의의 옛 지명]의 수령이 되자, 제일 먼저 현(縣)의 문헌을 찾아보았다’고 할 정도로 인사발령이 나자마자 안의현의 사정을 파악하는 일부터 먼저 하였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안의현의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쓴 「이처사(李處士) 묘갈명」에는 안의현이 정희량의 난으로 혁파되어 함양과 거창에 예속되었던 사실과 묘갈명의 주인공인 이성택(李聖擇)이 좌의정 김재로를 움직여서 고을을 복구시킬 수 있었던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박지원은 안음현이 혁파되어 함양과 거창에 예속된 이후 고을의 피폐상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역적들이 평정되자, 임금은 이 현에서 원흉이 나온 것을 깊이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그 고을을 혁파하고, 그 땅을 거창과 함양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이 두 고을은 모두 이 현의 하류에 있어 지난날 농지에 물을 댈 적에는 항상 남아도는 물을 구걸해 갔으며, 산에 가서 나무하고 풀을 벨 때에도 도끼를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땅이 두 고을에 종속되고 나자 공공연히 제방을 터서 물을 빼 가며, 대낮에 나무를 베고 남의 묘목(墓木)까지 모조리 찍어 가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입을 다물고 감히 따지지도 못하였으며, 곧 입술만 달싹거려도 도리어 역적이라 매도하였다. 부역에 종사하는 아전과 하인들은 종놈처럼 혹사당하며, 장정을 모아 군적에 올릴 때 사족(士族)까지 그 대상으로 삼으니, 그 고통이 뼈에 사무쳤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박지원이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는 고을이 복구된 지 50여 년이 지난 시기라서 그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된 상태였겠지만, 그는 항상 안의현의 이 같은 내력을 염두에 두면서 고을 행정을 펼쳐 나갔다. 즉 안의현의 위상과 자존을 회복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박지원은 재임 시절「안의현 사직단 신우기(安義縣社稷壇神宇記)」, 「안의현 여단 신우기(安義縣厲壇神宇記)」, 「안의현 현사 사곽후기(安義縣縣司祀郭矦記)」 등 안의현 소재의 제사시설과 관련한 기문 3편을 남겼는데, 이러한 기문을 통해 안의현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사직단을 증축하고 4개의 영성문(欞星門)을 고쳐 세우는 한편, 고을의 젊은이 중에 총명하고 준수한 자를 가려 뽑아 등록하여 집사(執事)로 삼는 등 제사 절차를 익히도록 하였다. 또한 여단의 제단을 새로이 고치고, 담장을 증축하고 따로 신우(神宇) 2칸을 지어 신위와 제기들을 옮겨 모시도록 하였다. 안의현의 서리들이 정유재란 때에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곽준(郭䞭)을 오랜 기간 추모하며 경건하게 제사 지내는 장면을 소개한 것도 안의현의 긍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박지원은 민생과 관련하여 수취 문제 등을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다. 함양군 둑 공사에 장정들을 징발할 땐 관아에서 식량을 대고, 고을별로 장정을 나누게 해서 대엿새 걸리던 일을 하루 만에 끝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뒤 5년 동안 둑 공사 부역으로 힘든 일이 없었다. 또한 송사를 엄격히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하였다. 안의현에는 호조의 저치곡(儲置穀) 1만여 석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박지원이 부임하여 조사하였더니 상당량이 모자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실을 감사에게 알리어 도움을 청하고, 아전들에게 시간을 주어 결국 2년 반 만에 포흠을 모두 채워 넣었다. 그리고 몇 차례 건축 활동을 통해 관아 주변을 깨끗하게 정돈하였다. 먼저 정무를 보던 정당(正堂)에서 서북쪽으로 수십 보 거리에 폐치된 관사를 치워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을 지었다. 이어서 백척오동각의 남쪽에 공작관(孔雀館)을 건립하였고, 이로부터 남쪽으로 수십 보 안 되는 거리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건립하였다. 박지원은 몇 종의 농사 기술도 개발하여 보급하였다. 북경 방문 길에 견문하였던 선진 농업기술을 안의현 현장에서 실행에 옮겨보고자 하였다. 그는 손재주가 있는 장인들을 가려 뽑아 풍구(颺扇), 베틀(織機), 용골·용미차(龍骨·龍尾車)[관개용 수차], 물레방아(水轉輪碾) 등 여러 농기구를 만들어서 보급함으로써 농사를 진흥시키고 민간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물레방아의 제작과 보급]

함양 산천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 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매년 10월이면 경상남도 함양군에서는 물레방아골축제가 열린다. 안의면 용추계곡로 일대에는 물레방아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민요 가사에 함양 산천 물레방아가 등장할 정도로 함양군은 물레방아의 상징적인 고장이다. 모두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 시절, 처음으로 이곳에서 물레방아를 제작하여 시험 가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지원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목격하였던 여러 과학기술을 안의현감 시절에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안의현에 물레방아를 설치하였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박지원이 안의현에서 물레방아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은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는 직접 찾을 수 없지만, 그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1780~1835]가 아버지의 전기(傳記)로 쓴 『과정록(過庭錄)』에서 확인된다.

‘아버지는 북경에 가셨을 때 농기구와 베틀 등 백성의 실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구들을 자세히 살펴보셨다. 귀국 후에 본떠 만들어서 국내에 통용시키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생활이 어려워 시도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안의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장인들을 가려 뽑아 양선(颺扇)[풍구], 직기(織機)[베틀], 용골·용미차(龍骨·龍尾車), 수전윤연 등 여러 기구를 제조케 하여 시험해보셨다. 힘을 적게 들이고도 일을 빨리할 수 있어 혼자서 수십 명이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이 기구들을 본떠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국내에 통용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박종채는 아버지 박지원이 물레방아뿐만 아니라 풍구와 직기, 수차를 제작하였다고 하였지만 그 규모나 규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수차에 대해서는 『열하일기』에서 ‘밭에 물을 대는 것으로 용미차(龍尾車), 용골차(龍骨車), 항승차(恒升車), 옥형차(玉衡車)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농소초』 수리편에서는 수차를 ‘번차(翻車)’라 하여 그 종류로 ‘수전번차(水轉翻車)’, ‘우전번차(牛轉翻車)’ 등을 소개하고, 그 규모와 제작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풍구(颺扇)는 곡물에 섞인 쭉정이, 겨, 먼지 등을 날리는 데 쓰는 연장이다. 박지원은 『과농소초』에서 ‘내가 경상도에서 고을살이를 할 때 풍구를 만들어 시험해 보았더니, 어린아이 하나가 이에 기대서서 발판을 약간 밟아도 100섬이나 되는 낟알을 하루에 다 부칠 수 있었다’고 하여 안의현에서 시험해 본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의 농가에는 이것이 집집마다 있으나, 우리는 이의 사용을 꺼린다고 개탄하였다. 『과농소초』 농기편에는 곡류를 갈고 찧고 빻는 농구로 대(碓)를 비롯하여 농마(礱磨), 전(輾), 해청전(海靑輾), 연마(連磨), 마(䃺) 등 6종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물론 서광계(徐光啟)의 『농정전서(農政全書)』 농기편에 있는 내용과 동일하나, 물레방아에 대한 소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박지원은 맷돌(䃺)을 소개한 다음에, 찧기용 농구에 대한 총평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어 주목된다.

‘방아(磨)의 제도는 하나가 아니며 대부분 축력을 이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시골에서 당나귀를 기르는 사람이 없어 소(牛)가 쉴 틈이 없다. 물레바퀴(水輪)가 있으면 가장 편리한데, 그 제도를 아는 사람이 없어 늘 한탄하였다. 이전에 북경에 갈 때 삼하현(三河縣)을 지나다가 강가에서 연장을 만들고 누에를 치고 보리를 찧을 때, 모두 거센 물살로 물레바퀴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지금 이를 모방하여 시행한다면, 농가에서 곡식을 찧고 탈곡하는 데 이로울 뿐만 아니라 수리(水利)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원은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소를 이용한 연자방아만 이용하고 있음을 지적한 후, 거센 물살로 물레바퀴를 돌리는 중국의 방식을 도입하자고 제안하였다. 물레방아라고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방아에 물레바퀴를 결합하고자 한 것은 곧 물레방아의 사용을 뜻한다. 그러나 박지원이 우리나라에서 물레바퀴, 곧 수차(水車)를 모른다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수차의 사용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있었고, 이후에도 수차의 제작을 권장한 사례가 보인다. 그러므로 박지원이 모른다고 한 것은 수차 그 자체이기보다는 물레와 방아를 연결하는 방식과 그 규격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안의현 현장에서 물레바퀴와 방아를 결합한 물레방아를 만들고 시험 가동하였던 것이다.

물레방아는 물방아에 물레바퀴가 결합된 형태이다. 디딜방아와 같은 원리지만 밟는 힘을 물의 힘으로 대신 이용한다. 흐르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물레바퀴(水輪)를 돌리면 바퀴의 굴대(軸)에 고정된 누름대[발]가 방아채의 다리를 누른다. 이때 방앗공이가 올라가고 누름대가 더 돌아 다리에서 떨어지면 공이가 아래로 처박히면서 방아를 찧는다. 디딜방아는 사람이 방아다리를 밟아 방앗공이를 놀려야 하므로 노동 부하가 큰 반면, 그 수는 적지만 물의 낙차를 이용해 가동되는 물레방아는 인력이 투입되지 않으면서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 박지원은 안의현감 시절 이를 시험한 것이다. 용추계곡이 흐르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안심마을연암 박지원이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시험 가동하였던 곳이다. 기백산황석산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용추계곡의 물길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를 돌렸다. 물레방아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려면 산골짜기와 같은 지형이어야 한다. 계곡이나 계곡 아래쪽의 경사진 구릉지역이 물레방아 돌리기에 가장 좋은 입지이다. 박지원이 함양군의 용추계곡을 골라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시험한 것은 조건에 가장 알맞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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