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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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貴千孝子旌閭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신안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석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55년 - 조귀천 효자 정려 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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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조귀천 효자 정려비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신안리 |
성격 | 정려비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신안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조귀천의 정려.
[위치]
함양군 안의면 신안리 독산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개천인 지우천과 인접하여 있다.
[형태]
비의 형태는 화강암의 받침 위에 비석을 놓았으며, 비석의 양쪽에 장방형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가첨석을 올려놓았다. 비에는 ‘효자백정조귀천지려 부득악질단무명지화 이진기질즉유사문복호 명려 함풍5년 을묘 사월이일 중건(孝子白丁趙貴千之閭 父得惡疾斷無名脂和 以進其疾卽愈事聞復戶 命閭 咸豊五年 乙卯 四月初二日 重建)’이라 새겨 놓았다. 즉 효자 백정 조귀천의 정려로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렸을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국에 섞어 먹여 부친의 병이 완쾌되었으며 정려와 함께 호세(戶稅)를 면제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정려비가 세워진 시기가 새겨져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비가 세워진 것은 1855년이지만 중건된 것이고, 조귀천의 효행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소개된 점 등을 고려하면 조귀천에게 내려진 정려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제작된 시기인 1617년 이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황]
조귀천은 원래 백정이 아닌 양반으로서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는 소의 간 1,000개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는 소의 간을 마련할 수 없어 스스로 백정이 되어 소의 간 1,000개를 부친에게 먹여 부친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전설이 함양지역에 전해 내려온다.
[의의와 평가]
조귀천 효자 정려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백정한테 내려진 정려로 그 의미가 크다. 특히 조귀천의 효행에 대해서는 1617년(광해군 9)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 부재학 이성 등이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효자도(孝子圖) 제2권 귀천단지(貴千斷指)편에 소개되고 있어 조귀천의 효행이 함양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효행 사례로 국가 차원에서 홍보하였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