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황재 민간인 학살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407
한자 大篁岾民間人虐殺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지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9월 27일연표보기 - 대황재 민간인 학살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50년 9월 28일연표보기 - 대황재 민간인 학살 사건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50년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한 내 조선인민군의 퇴각
발생|시작 장소 대황재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지도보기
종결 장소 도톡골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운곡리 지도보기
성격 민간인 학살 사건
관련 인물/단체 조선인민군|경상남도 정치보위부|경상남도 내무부원|101보안연대

[정의]

1950년 9월 27일부터 28일까지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대황재 일대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한국전쟁 중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9월 20일 유엔군의 주력부대가 한강을 넘어 26일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북한노동당은 9월 중순경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려 사실상 퇴각하였으며, 9월 28일을 전후로 지방단위 조직들을 각 도내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켰다.

[경과]

한국전쟁 중 함양군 일대을 점령한 조선인민군들은 점령기간 동안 지역 경찰·군인·공무원 등 우익계 인사와 가족 등을 소위 반동분자로 간주하여 함양을 비롯하여 진주, 거제, 고성, 삼천포 등지에서 색출하여 진주형무소에 수감하였다. 1950년 9월 27일 함양 지역 조선인민군들은 퇴각하면서 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우익인사 등을 모두 트럭에 싣고 이동하였는데, 트럭이 함양군 서하면 대황재[고개]를 넘지 못하자 트럭에서 내려 걸어서 이동시키던 중 수감자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미(美) 전쟁범죄 조사단 보고서 「KWC#171」, 「KWC#384」 자료에 의하면 경상남도 정치보위부의 명령에 따라 경상남도 내무부원, 101보안연대, 지방좌익 등이 집단 학살에 가담하였다.

[결과]

민간인 집단 학살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950년 9월 28일 오후 6~7시까지 함양군 서하면 운곡리 도톡골에서 약 90명이 학살되었고, 9월 27~28일 이틀에 걸쳐 함양군 서하면 대황재 부근 일대에서 약 500명이 학살되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포로 대부분이 한복 또는 평상복 차림이었고, 줄에 묶여 있었으며, 인원수가 많아 한곳에 몰아넣고 난사하였다. 대검찰청이 펴낸 『좌익사건실록』에도 인민군 퇴각 시 경상남도 진주시 내무서에 구속된 수감자들을 포로로 북행시키던 가운데 함양 대황산(大皇山)에서 총살시킨 기록이 있다.

[의의와 평가]

1952년 3월 31일 한국정부 공보처 통계국에서 발간한 『6·25사변 피살자명부』에는 한국전쟁 중 공무원 및 일반인 등 비전투자로 인민군 및 좌익에 의해 피살당한 5만 9,964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9월 26~28일 인민군 퇴각기에 지방단위에서 학살당한 피해자의 총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함양군 대황재 집단학살의 경우 피살된 영령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함양 육십령 고개에서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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