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30
한자 倭寇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ders
이칭/별칭 왜적,왜노,일본인 해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념용어(일반)

[정의]

고려 시대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 해적의 총칭.

[개설]

고려시대 왜구는 고려 고종(高宗) 때부터 멸망까지 빈번하게 침략해 왔는데, 왜구가 집중적으로 출현하였던 시기는 충정왕(忠定王) 이후 1392년(공양왕 4)까지 약 40년간이다. 그중에서도 우왕(禑王) 재위 14년간(1375~1388)에 가장 극심하였다. 기록상으로 볼 때, 고려시대 전국적으로 529회 정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이 가운데 경상도 지역에는 114회 정도의 침입이 있었다.

[현황]

고려 고종 때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왜구는 충정왕 때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여 이후 서남해 연안지역은 물론 수도 개경까지 위협함으로써 국가 위기상황을 조성하고 있었다.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 횟수는 모두 529회인데, 이것은 1223~1392년(고종 10~공양왕 4)까지 169년간의 통계이다. 왜구의 침입이 가장 많았던 때는 공민왕과 우왕 때였다. 공민왕 때의 115회와 우왕 때의 378회를 합치면 493회로 전체의 침입 횟수의 93%에 해당된다.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이 수천 명의 인원으로 침범할 때도 있었다. 왜구의 침입 목적은 재화의 약탈이었다. 왜구는 곡식을 저장해둔 관창(官倉)을 습격하였다. 또한 해상에서 조운선을 공격하여 양곡을 탈취하거나 인명을 살상하였다.

함양 지역에 대한 왜구의 직접 침입은 연해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인 1379년(우왕 5)부터이다. 1379년 9월에 왜구는 산음(山陰)·진주·사주(泗州)를 거쳐 함양까지 침입해 왔다. 1380년 8월 왜구는 함양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면서 총공세를 펼쳤다. 원수 배극렴(裴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湧奇)·오언(吳彥)·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裴彥)·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 등이 이에 맞서 반격하였다. 하지만 원수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해 병사 50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배하였고, 경상남도 함양 지역은 마침내 도륙되고 말았다. 1384년(우왕 10) 11월에 다시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에 도순문사(都巡問使) 윤가관(尹可觀)과 진주목사 박자안(朴子安)이 전투를 지휘하여 왜구 80여 급을 목 베는 전과를 올렸다. 1389년(창왕 원년) 7월에도 왜구가 함양을 노략질하였다.

[결과]

왜구의 침입으로 경상남도 함양 지역사회는 인명 살상·촌락 파괴·관아 소실·농토의 황폐화 등 인명과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아울러 인구이동 등을 불러와 지역사회의 변동을 초래하는 배경이 되었다. 함양성이 함락되는 등 함양 지역 행정의 중심지가 큰 타격을 입어, 행정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치소(治所)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치소는 조선시대 읍성이 있었던 문필봉 밑에 토성을 쌓은 곳으로 관아를 옮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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