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006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홍성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624년 10월 - 백제, 신라의 속함(함양) 지역 등을 함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80년 - 왜선 500척, 함양 침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7년 - 왜군, 8월 16일 황석산성 공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29년 - 안음현, 함양과 거창으로 나누어 속한 후 함양부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67년 - 안음현, 복구 후 안의현으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88년 - 함양부, 함양군으로 개칭
사근산성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지도보기
황석산성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지도보기
개념용어(개관)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경상남도 함양군의 역사.

[선사 시대]

함양 지역은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아왔다. 현재까지 함양군에는 구석기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인접한 거창읍 장정리에서 후기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었고, 거창 임불리에서도 중기 구석기 유적이 조사되었으므로 함양군에서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남아 있는 함양군 유적으로 볼 때,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유림면손곡리 유적수동면화산리 유적, 안의면 하원리 유적 등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다. 하원리 유적의 경우 야외노지·석기제작장·수혈(竪穴)[땅 표면에서 아래로 파 내려간 구멍]·집석유구 등이 조사되었고, 신석기 중후기에 해당하는 태선집선문·자돌문·격자문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부터는 생활 면적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유물과 유적으로 통해 알 수 있다. 지석묘[고인돌]와 같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이 조사되었다. 지석묘는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유림면 손곡리, 섬동마을, 함양읍 백천리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안의면 이전리, 황곡리, 백천리유림면 장항리에서도 청동기 시대 유물이 확인되었다. 특히 장항리에서는 각종 민무늬토기편인 공열문토기, 공열구순각목토기, 횡침선문 적색마연토기, 외반구연토기 등의 각종 민무늬토기편이 조사되었고, 반월형돌칼·돌낫·그물추 등도 출토되었다. 마을유적은 안의면 신안리 유적에서 송국리형 집터가 조사되었다.

[고대]

삼국 시대의 함양 지역에 대한 문헌기록은 분량이 적어 역사적 실체를 헤아리기 쉽지 않다. ‘함양’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권34 지리1 신라 천령군(天嶺郡)조이다. 천령군은 본래 속함군(速含郡)인데, 757년(경덕왕 16)에 이름을 고쳤다. 현재의 함양군(咸陽郡)이며, 운봉현(雲峰縣)과 이안현(利安縣)의 2현을 거느렸다. 운봉현은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이고, 이안현은 함양군 안의면이다. 속함이란 지명은 가야 시기의 함양 지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의 지명이다.

삼국 시대의 함양 지역은 가야에 속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고고자료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상백리 고분군, 백천리 고분군, 공배리 고분군, 손곡리 고분군, 난평리 고분군, 상개평리 고분군, 창평리 고분군 등이 있다. 백천리 고분군의 발굴 결과 5~6세기경 가야에 속하는 하나의 정치집단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취락유적으로는 백천리 유적에서 6세기 전반대의 집자리가 4동 확인되었다. 수동면 화산리 유적에서는 3~5세기대의 주거지가 다수 확인되었는데, 부뚜막과 고래가 갖춰진 난방시설이 확인되었다. 또한 일상생활에 사용된 다양한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수동면 우명리 유적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주거지가 16동 확인되었다.

가야에 속하였던 함양 지역이 언제 신라에 복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정복되었다고 하므로, 이 무렵에 신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는 가야를 멸망시킨 후 백제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함양 지역은 백제와의 접경지이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 간의 전쟁이 잦았다. 『삼국사기』 백제 624년(무왕 25) 10월조에, “겨울 10월에 신라의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용책 등 6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함양 지역에는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박회성, 육십령고성, 방지고성 등이 축조되어 있다.

결국 신라가 함양 지역을 정복한 후 함양을 속함(速含) 또는 함성(含城)이라 하였고, 757년에 천령군으로 개칭하고 운봉현과 이안현을 영현으로 두었다. 신라 말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천령군의 태수로 재직하였는데, 홍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상림(上林)을 조성하였다.

[고려 시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천령군의 영현이었던 운봉현이 남원부로 이속되고, 함양에는 995년(성종 14)에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鍊使)를 두었다. 허주(許州)는 함양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지방세력의 통제강화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하여 도단련사 제도를 실시하였다.

1012년(현종 3)에는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되어 합주에 속하였다. 1018년(현종 9)에 다시 군으로 환원되어 이안현과 함께 합주에 소속되었으며, 함(含)자를 고쳐 함양군(咸陽郡)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다시 현(縣)으로 강등되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안현[안의]은 1018년(현종 9)에 합주에 소속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거창군 소속인 감음현(感陰縣)에 병합되고 감무(監務)[중앙의 관원을 파견하지 못한 지방의 작은 현을 다스리기 위하여 두었던 지방관]가 설치되었다.

고려 말에 함양 지역에는 왜구의 침략이 많았다. 1380년(우왕 6)에는 왜선 500척이 함양으로 침략해 왔다.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 등 9명의 장수가 사근산성 등지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장수 박수경과 배언이 죽고, 군사 500명도 전사하였다. 왜구들이 남원으로 향하는 길에 인월역에 주둔하였다가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었다.

1384년(우왕 10)에도 왜구가 함양을 침략하였고, 창왕 때에도 왜구가 출몰하였다.

[조선 시대]

조선이 개국된 이후 1395년(태조 4)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고, 1466년(세조 12)에는 함양군이 되었다. 1417년(태종 17)에 감음현을 안음현(安陰縣)으로 개칭하고, 현을 거창에서 지금의 안의로 이전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함양군 가구 수는 428호에 1,948명이 살았으며, 안음현은 481호에 793명이 살았다.

1470년(성종 1) 김종직이 함양군수 재임 중에 객사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현판을 철거한 것이 뒷날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1473년 현감 최영(崔榮)이 안의향교를 설립하였다. 1494년에는 문명이 높던 정여창이 고향인 안음현의 현감을 자청하여 광풍루(光風樓)를 중수하고 백성 교화에 힘썼다.

정유재란 때, 함양 지역은 호남과 영남의 길목이어서 일본군이 침략해 왔고, 황석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1597년(선조 30) 8월 16일에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일본 장수들이 황석산성을 공략하였다. 전임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음현감 곽준의 일가족 등이 황석산성에서 왜적의 주력부대를 맞아 끝까지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산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성안의 백성들을 처절하게 죽이고, 육십령을 넘어 진안현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였다.

1629년(인조 7)에 군관(軍官)으로서 북도에 유배되어 있던 양경홍(梁景鴻)이 후금과 내통하여 역모를 하려다 발각되어 현으로 강등되었다. 1728년 이인좌의 난과 함께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였는데,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의해 토벌되었다. 안음현은 혁파되어 함양과 거창으로 나누어 속하게 되었다. 1729년에 함양부가 되었다. 1736년에 안음현이 복구되었다가, 1767년에 안의현으로 개칭되었다. 1788년에 함양부에서 다시 함양군이 되었다.

『함양부읍지』『안의현읍지』 등에 따르면, 1759년 함양부의 가구 수는 4,763호에 2만 1,640명이 살았고, 1771년 안의현의 가구 수는 4,565호에 1만 9,311명이 살았다. 1791년에는 실학자인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5년간 재임하기도 하였다.

[근대]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 개정으로 안의현이 안의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안의군이 폐지되었다. 1933년에는 대지면이 안의면에 합병되어 12개면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함양 지역에서도 일제에 저항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1919년의 3·1운동 이후 함양 지역에서는 3월 28일에 함양읍 장날의거가 일어났다. 3월 31일에는 안의장터에서 안의의거가 일어났다. 4월 2일에도 함양장터에서 군민 3,000명 정도가 제2차 시위를 하며 ‘검거한 우리 애국인사를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1920년대에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사회단체는 함양청년회, 함양노동회, 함양군 농회, 함양형평사, 함양소년회, 신간회 함양지회 등이 있었다. 신간회 함양지회의 경우 설립 준비가 함양 지역 단체 간의 연합으로 발기되었다. 청년단체가 중심이 되었는데 함양청년회는 정기총회 자리에서 신간회 가입을 결정하였다.

[현대]

해방 이후 함양군에는 많은 사람이 귀환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갔던 청장년을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들도 함양으로 돌아왔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징병·징용·학병을 피해서 산으로 숨어 무장단체를 조직하였던 사람들도 산에서 내려왔다. 그로 인해 함양 지역에도 좌우의 이념적 갈등이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좌익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등이 활동하였다. 보수조직으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 한국광복청년회, 대한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함양 민보단 등이 활동하였다.

함양군은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6·25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6·25전쟁은 함양군에 커다란 피해를 안겼던 것으로, 1953년 휴전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빨치산 토벌이 거의 마무리되는 1954년까지도 함양군은 전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957년 함양면이 석복면(席卜面)을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 안의면 춘전리·진목리가 거창군 남상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6년에는 휴천면에 엄천(嚴川)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4년에는 군의 중앙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88올림픽고속도로[현 광주대구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93년 함양군은 1읍 10개 면을 관할하고 있다. 1998년 엄천출장소가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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