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손처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578
한자 輓詞[孫處訥]
영어공식명칭 Funeral Ode For Teacher Gye-dong
이칭/별칭 「계동선생만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명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53년 - 「만사」[손처눌] 저자 손처눌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585년연표보기 - 「만사」[손처눌]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34년 - 「만사」[손처눌] 저자 손처눌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784년 - 『모당집』 간행
배경 지역 계동선생유적비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지도보기
배경 지역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79-4]지도보기
성격 애제류|만사
작가 손처눌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손처눌이 대구 지역 출신인 전경창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사.

[개설]

「만사」[손처눌] 저자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이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대구부(大丘府) 수성리(壽城里) 황청동(黃靑洞)[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서 태어났다.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1566년 열네 살 때부터 전경창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조호익(曺好益)[1545~1609]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전경창의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자는 계하(季賀)이고, 호는 계동(溪東)·만오(晩悟)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인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전순(全珣)이고, 어머니는 김해송씨(金海宋氏) 송식(宋軾)의 딸이다.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직은 예조좌랑·병조좌랑·검열·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대구 유학의 개조(開祖)로 평가받으며, 대구 유학의 수서원(首書院)인 연경서원(硏經書院) 창건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대구광역시의 연경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溪東集)』이 있다.

「만사」[손처눌]는 「계동선생만사」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

[구성]

「만사」[손처눌]는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내용]

계동항북행상련(溪東巷北幸相聯)[계동 마을 북쪽으로 다행히 서로 이어져 있어]

함장종용문기년(函丈從容問幾年)[선생님을 따른 지 몇 년인가 가만히 물어보네]

일자진운리우합(一自秦雲離又合)[한 번 진나라 구름 흩어지고 다시 모인 뒤로]

매련오월결환원(每憐吳月缺還圓)[매양 오나라 달이 기울었다가 다시 채워짐을 가련히 여겼네]

매화파수류시별(梅花巴水留詩別)[파수에 매화 필 때 시 남겨 주시고 떠나셨지만]

풍수왕성공촉면(楓樹王城共燭眠)[왕성에 단풍들 때 함께 등불 쓰며 잠들었네]

통곡유명천리격(慟哭幽明千里隔)[천 리 밖에서 유명을 달리하심을 통곡하고]

영반류거루현천(迎攀柳車淚懸泉)[상여 맞이하여 부여잡으니 눈물이 샘처럼 흐르네]

[특징]

「만사」[손처눌]는 ‘선(先)’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전경창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그리움의 정서가 바탕을 이룬다.

[의의와 평가]

「만사」[손처눌]는 공간적 특성을 잘 활용한 시이다. 수련(首聯)에 전경창이 거처한 수성구 ‘파동(巴洞)’과 손처눌이 거처한 ‘상동(上洞)’의 가까운 지리적 특성을 친밀도로 나타내었고, 함련(頷聯)에 중국 진나라와 오나라의 먼 위치를 설정하여 그리움의 정서를 배가시켰다. 경련(頸聯)에는 매화와 단풍을 통하여 시간적 거리를 설정하여 전경창과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이는 미련(尾聯)에서 전경창의 죽음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