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35
한자 烈女
영어공식명칭 Virtuous Woman
이칭/별칭 열부,절부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혜금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목숨을 바쳐 자신의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과 시댁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바친 부녀자.

[개설]

위기 상황에서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고난 속에서도 오랜 세월 수절(守節)한 부녀자를 주로 일컫는 말이며 넓게는 남편과 시가를 위해 헌신하는 여성을 말한다. 열부(烈婦)와 절부(節婦)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같은 의미로 쓰인다.

조선은 초기부터 이른바 정표정책(旌表政策)을 통해 열녀의 행적을 알리고, 귀감으로 삼도록 하여 유교적인 여성관을 장려하였다. 열녀 이데올로기가 강화되어 여성의 도리로 굳건히 자리 잡은 것은 양난(兩亂) 이후 조선 후기이다. 그에 따라 단순히 수절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따라 죽거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등 극단적인 행위를 한 여성에 대해 포상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열녀에 대한 포상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조선 후기로 가면서 열녀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진위가 문제 되기도 하였다. 또한 여성에게 정절이 강요되는 등의 부작용이 속출하게 된다.

[함양 지역의 열녀]

경상남도 함양 지역 열녀에 대한 기록은 『경상도읍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천령지』, 『삼강행록』 등에 남아 있다. 경상남도 함양군의 열녀 유형은 다른 지역의 열녀들과 대체로 비슷하다. 남편 사후 수절하기 위해 자결한 경우[혹은 미수에 그친 경우]가 많다. 이 외에 병을 얻은 남편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거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복한 사례 등이 있다. 여러 유형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아픈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하였지만 남편이 죽자 자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자결이 미수에 그치고 평생 시부모를 모시며 도리를 다한다는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만나 자결하거나, 왜적에게 저항하다 해를 당한 경우가 다수여서 경상남도 함양 지역이 당시 전쟁의 피해가 심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전쟁 중 위급한 상황에 목숨으로 정조(貞操)를 지키거나, 어린 나이임에도 남편을 잃어 재가를 권유받았으나 거부한 사례도 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 열녀는 남편이 죽자 따라서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하였음에도 실패한 경우가 많다. 남편의 죽음 앞에 오히려 시부모를 위로한다거나, 장례를 다 치른 후 조용히 자결하였다는 기록도 다수이다. 이는 남편의 죽음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정 내에서 며느리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는 점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함양군사』에 이러한 경우가 20건 이상 나타나 가장 흔한 유형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여성의 정절을 죽음으로 지키는 행위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둠에 따라, 여성의 자결을 강요하였던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권수룡의 처 강씨는 남편이 죽자 음식을 먹지 않고 자결하였고, 이재용의 처는 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김궤의 처는 남편이 죽자 독약을 먹고 난간에서 ‘여러 번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넘어, 죽는 방식에 있어서의 극단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 외에 목을 매거나 약을 먹어 자결한 사례가 많고, 자결한 것인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다. ‘조용히 죽었다’ 혹은 ‘조용히 취의(就義)하였다’와 같이 표현된 경우다. 서세진의 처는 남편이 죽자 상을 치른 후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취의하였고, 우사중의 딸은 오랜 병 끝에 남편이 죽자 조용히 죽었다. ‘조용히 자결하였다’, ‘조용히 목숨을 끊었다’와 같은 표현이 비슷한 사례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경우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하종대의 딸이며 김영갑의 처는 남편이 죽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바라며 자결하였는데, 그러자 죽었던 남편이 다시 살아났다는 믿기 어려운 사례도 있다.

남편이 죽었음에도 시부모를 섬기고 후사를 이은 경우도 『함양군사』에 10건 이상 보인다. 친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 등을 양자로 삼아 키운 경우가 많았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끊지 않은[혹은 자결에 실패한]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송만호의 처는 16세에 결혼하여 한 달도 못 되어 남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를 효로써 섬기고, 어린 조카를 양육하여 남편의 후사를 잇게 하고 조용히 죽었다. 김치근의 딸이자 노원경의 처는 남편이 병으로 죽자 자결하지 못하고 시부모를 봉양하였고, 신재영의 딸은 남편이 죽었는데 삼 년 동안 지친 기색 없이 시부모의 마음을 위로하고 조카를 키워 후사를 잇게 한 후 남편의 기일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정절을 지키며 계속해서 슬픔 속에서 살아간 경우도 열녀로 칭송받았다. 고치운의 딸은 남편이 죽은 뒤 웃고 말하는 일이 없어 칭송받았고, 민치순의 딸은 23세 때 남편을 잃고 재종질을 입양하여 키우며 육십이 넘도록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실부인이 아닌 비첩이나 종이 절개를 지켜 열녀로 인정받은 경우도 있어 흥미롭다. 열녀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하층계급에까지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판서 송천희의 비첩은 일평생 수절하며 천희의 고향에서 늙어 죽었고, 자질비(者叱非)라는 종은 주인 임경춘이 버린 후에도 머리를 깎고 절개를 지키며 일생을 지냈다.

위험한 상황에서 남편이나 시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경우가 있다. 남편이 범에게 물려 가자 범을 죽이고 남편을 구하였다거나, 호미로 범의 눈을 찍어 남편을 구하였다는 믿기 힘든 사례가 기록에 남아 있다. 살아 있는 남편이나 시댁 식구가 아니라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 같은 물건을 구한 경우도 있다. 민현수의 딸은 집에 불이 나자 불 속으로 들어가 시아버지의 신주와 남편의 혼백[신주를 만들기 전 임시로 만든 신위], 아들을 구해왔다. 박봉섭의 딸도 불난 사당에서 남편의 신주를 구해왔다고 하고, 이주우의 처는 전쟁 중에 남편의 혼상(魂箱)을 안고 피신하였다 한다.

효자에 비해 열녀의 활동에는 하늘을 감동시킨 기적적인 사연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데 남편이 죽은 후 재가를 권유받았으나 거부하고 정절을 지킨 여인을 호랑이가 지켜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 걸 보면, 재가 거부에 큰 가치를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덕추의 딸은 남편이 죽자 친가에서 재가를 권해, 아이를 업고 도망치자 범이 길을 지켜주었다. 임창운 아내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이양의 처는 남편 사후에 다른 남자가 아내로 삼으려 하자 목을 찔러 자결하였고, 김종윤의 처는 남편이 죽은 후 재가를 권하자 곡기를 끊어 자결하였다.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경우가 다수 나타난다. 특이한 것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경우도 포함되어 있어, 남편에 대한 정절이라는 의미에서 여성이 지녀야 할 도리로 의미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함양군사』에는 노사온의 딸 외에 7명이 정유재란 때 정조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중 두 명이 처녀이다.

또한 효자의 경우와 비슷하게 남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먹인다거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등 지극한 정성을 다한 사례가 있다. 이인용의 처, 노광중의 딸, 연학명의 처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복한 사례도 있다. 특이한 것은 허경의 처와 같이 시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 사례도 열녀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허경의 처는 범의 고기를 구할 수 없자, 벽에 범 그림을 그려서 그것을 태워 재를 드리니 시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오대추의 딸은 남편을 정성껏 간호하자 꿩이 날아오고 얼음에서 물고기가 튀어나왔다고 하며, 박승원의 처는 남편에게 올릴 제수(祭羞)가 떨어져 슬피 우니 고양이가 꿩을 잡아 왔다. 최응숭의 딸은 남편이 죽자 ‘범이 있거든 나를 잡아가라’고 생각하였는데, 범이 나타나 남편의 묘로 고이 옮겨놓았다고 한다.

[역사적 의미]

‘열녀’는 유교 국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양난을 거친 후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그 후 여자가 정절을 훌륭하게 지키는 행위의 범위와 대상이 더욱 넓어져, 여성의 도리로 일반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때문에 ‘열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행위가 필요하게 된다. 열녀가 만들어지는 이러한 과정을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열녀 사례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은 특히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곳이며, 열녀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는 만큼 열녀를 연구함에 있어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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