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인민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410
한자 咸陽人民委員會
영어공식명칭 Hamyang People’s Committee
이칭/별칭 함양군 인민위원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동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5년 9월연표보기 - 함양인민위원회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45년 10월 - 미군정의 진주와 방해로 인민위원회의 합법 활동 불가
최초 설립지 함양인민위원회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고운로 35 지도보기
성격 민간 행정 자치 기구
설립자 박병두

[정의]

1945년 9월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설립된 민간 자치 기구.

[개설]

1945년 해방 직후인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방조직들도 인민위원회로 재편되었다. 경상남도 인민위원회는 10월 5일 부산에서 결성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각 지역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함양군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행정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945년 10월 초 미군정의 진주와 방해로 합법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설립 목적]

함양인민위원회는 해방 이후 치안과 행정 안정을 담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함양인민위원회 지도부는 하준수(河準洙)[1921~1955]를 비롯한 일본에서 귀환한 학병들이었다. 일본 군대에 복역한 것이 아니라 징용·징병을 피하여 1944년 인근 산으로 피신하여 있던 사람들이었다. 귀환 학병들은 경상남도 함양 지역으로 들어와 한국인 경찰관과 총독부의 한국인 관리들을 체포하고 군청을 접수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함양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박병두(朴炳斗)[1883~?]였고, 대의원은 강석주·하기제·정병훈이었다.

1945년 10월 초 미군정이 경상남도 전역에 진주(進駐)[군대가 쳐들어가거나 파견되어 가서 주둔함]함으로써 인민위원회를 와해시키려 하였고, 인민위원회는 저항하였다. 함양군에도 미군이 진주하면서 일본 경찰이 석방되었고, 경남도장관이 임명한 50여 명의 경찰이 파견되어 많은 비행을 저질렀다. 예비검속이라 하여 공산당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만들었다. 이에 함양인민위원회는 파견된 경찰과 대립하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지역의 상황에 따라 소작료 문제, 귀환동포, 노동 문제 등을 다루었다. 특히 인민위원회는 해방 공간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인 치안과 행정 안정에 주력하였다. 치안 업무는 주로 일본군 패장병의 횡포를 막는 것, 토지·산업체 등 군수물자를 멋대로 처리하는 것을 감시하는 것 등이었다. 또 인민위원회는 지방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과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재산을 한국인들에게 귀속시켜 배분하는 것과 농업·토지·노동문제 등의 해결에 힘썼다. 그 밖에 인민위원회는 면별로 국민학교, 중학교 등을 설립하여 자치 교육을 실시하는 등 지역 및 마을 행정을 주도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방 이후 설립된 민간행정자치기구로서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여 지역 안정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미군정 와해 정책으로 인민위원회의 역할이 축소되었고, 설립 목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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