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막성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16
한자 阿莫城戰鬪
영어공식명칭 Battle of Amag seong
이칭/별칭 모산성 전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김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602년 8월연표보기 - 아막성 전투 발생
종결 시기/일시 602년 8월연표보기 - 아막성 전투 종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603년 7월 - 왜의 신라침공계획 취소
특기 사항 시기/일시 603년 8월 - 고구려 철수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무왕|진평왕|해수|귀산

[정의]

602년 8월에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경계인 아막성에서 신라와 백제가 싸운 전투.

[개설]

아막성모산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막성은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경계 부근인 팔량치 고개에 위치한다.

[역사적 배경]

7세기 초 신라는 왕권과 대·내외적 상황이 안정화되면서 옛 가야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고히 하고, 소백산맥 이서 지역 진출을 시도하였다. 백제는 신라의 성장을 압박하고 공격하기 위하여 601년에 고구려·왜(倭)와 맹약을 맺었다. 이후 백제는 오랜 기간 동안 4만 대군을 마련하여 신라 공격을 준비하였지만, 고구려와 왜는 각각의 사정으로 유보하였다. 고구려는 수(隋)의 돌궐 공격 탓에 신라 공격을 주저하였고, 왜는 병력과 선박을 대규모로 마련하였으나 왜군 총사령관인 내목황자(來目皇子)의 병환으로 신라 출병이 연기되었다. 이로 인하여 백제가 단독으로 신라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경과]

602년 8월에 백제 무왕은 남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경계 부근인, 팔량치에 있었던 아막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신라는 아막성을 구원하기 위해 수천 명의 기병을 급파하여 백제군을 격퇴시켰다. 직후 신라는 대규모 원군을 파견하여 아막성의 방어망을 단단히 구축하고, 백제를 역공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신라군은 아막성에서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으로 진격하여 백제의 4만 대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후 철수하려고 하던 신라군은 백제의 군사작전에 휘말려 오히려 백제군의 역습을 받아 대규모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신라 장군인 무은(武殷)이 포위당하자, 무은의 아들인 귀산(貴山)이 동료인 추항(箒項)과 함께 나서 분투하였다. 그 결과 신라군은 승기를 잡았고, 아막성에서 백제의 4만 대군에 맞서 승리하였다.

[결과]

신라가 아막성 전투에 승리하자, 왜는 신라 침공계획을 취소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603년 8월에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지만 진평왕을 필두로 1만 대군이 나서자 고구려군의 위세에 꺾여 결국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602년의 아막성 전투는 신라가 주변 국가로부터 오는 위기를 극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향후 삼국통일을 위한 신라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변하게 한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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