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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76
한자 梁弘澍
영어공식명칭 Yang Hongju
이칭/별칭 대림,서계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0년연표보기 - 양홍주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 양홍주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남원
대표 경력 의금부 도사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 출신 문신.

[가계]

양홍주(梁弘澍)[1550~1610]의 자는 대림(大霖),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양황(梁榥)[1575~1597], 차남은 양원(梁榞)[1590~1650]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양관(梁灌)[1437~1507],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양응곤(梁應鯤),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1515~1580]이다. 부인은 연안이씨 현감 이사민(李師民)의 딸이다.

[활동 사항]

양홍주는 처음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을 스승으로 섬겼으나 나중에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바른 학문을 얻었다는 것을 듣고 성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80년(선조 13) 아버지 양희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사망하였다. 그때 양홍주의 행적에 관해 상이한 기록이 두 가지 남아 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부친의 운구가 한양에 이르렀음에도 장례를 제대로 주관하지 않고 상례를 묻는다는 핑계로 양홍주가 성혼의 집에 있었다”는 정인홍(鄭仁弘)[1535~1623] 측의 비판이 있다. 이에 반하여 송시열이 지은 양홍주의 묘갈명에서는 양홍주가 직접 국경에서 운구를 맞는 등 극진히 예를 다하여서 상을 치르었다고 새겨져 전하여진다. 양홍주와 정인홍은 처남·매부 사이이었지만 서로 질시하여 교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인들은 정인홍이 장인의 상가에 가서 곡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인홍이 영남에서 창의(倡義)하였으나 사이가 좋지 않은 양홍주는 정인홍의 창의에 동조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어가(御駕)[임금이 타는 수레]를 따랐다. 당시 공으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향리로 물러났다. 선조 말년에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정인홍을 탄핵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양홍주가 남긴 글로는 『서계유고(西溪遺稿)』 2권 1책이 필사본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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