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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42
한자 李穡
영어공식명칭 Lee Saek
이칭/별칭 목은,영숙,문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신은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28년 5월 9일연표보기 - 이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41년 - 이색, 성균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42년 - 이색, 문음으로 별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48년 - 이색, 원나라 국자감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배움
활동 시기/일시 1354년 - 이색,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국사원편수관 지냄
활동 시기/일시 1391년 - 이색, 한산부원군에 책봉
몰년 시기/일시 1396년연표보기 - 이색 사망
출생지 경상도 영해부
거주|이주지 충청도 한주
수학|강학지 한산 숭정사(崇政寺) - 충청도 한주
외가|처가 이색 외가 - 경상도 영해부
외가|처가 이색 처가 - 경상도 복주목
묘소|단소 이색 묘소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사당|배향지 임강서원 - 경기도 장단군 북면 고랑포리
사당|배향지 신항서원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이정골
사당|배향지 문헌서원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사당|배향지 단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경력 성균관 대사성|판문하성사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에 거주한 유학자이자 문신.

[개설]

고려 후기 유학자이자 문신 관료로서 공민왕 때 성균관을 다시 짓고 난 뒤 성균관 대사성 자격으로 박상충(朴尙衷)[1332~1375], 정도전(鄭道傳)[1342~1398], 권근(權近)[1352~1409] 등 신유학자들을 육성하였다.

[가계]

이색(李穡)[1328~1396]의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할아버지는 이자성(李自成)[?~1310], 할머니는 이춘년(李春年)의 딸이다. 아버지는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 어머니는 생원 김택(金澤)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 권한공(權漢功)[?~1349]의 장남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다.

[활동 사항]

1341년(충혜왕 복위 2) 김광재(金光載)[1294~1363]가 주관한 성균시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342년(충혜왕 3)에 아버지 이곡의 문음(門蔭)[고려·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음서]으로 별장에 임명되었으나 1344년 11월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였다.

1348년(충목왕 4)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배웠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으로 귀국하였다가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를 비롯한 시정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왕에게 올렸다. 1354년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고려로 귀국한 후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지공부사(知工部事), 지예부사(知禮部事) 등 관직을 지냈다.

신돈(辛旽)[?~1371]이 등용된 후 성균관이 재건축되자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金九容)[1338~1384], 정몽주(鄭夢周)[1337~1392], 이숭인(李崇仁)[1347~1392] 등과 함께 신유학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이 발생하자 조민수(曺敏修)[?~1390]·이림(李琳)[?~1391] 등과 논의하여 창왕(昌王)을 옹립하였고, 이후 문하시중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창왕 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를 추진하였으나 이림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고향으로 낙향하였다가 공양왕이 즉위하자 다시 판문하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이성계 일파인 김저(金佇)[?~1389]의 옥사로 인하여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정몽주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정몽주가 피살되자 다시 금주(衿州)[지금의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졌지만 1396년 여강(驪江)[경기도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을 일컫던 이름]으로 가던 도중에 여흥[지금의 경기도 여주]에 있는 신륵사에서 사망하였다.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에 있는 명문(明文)과 1899년 제작된 『함양군읍지』에 의하면, 이색은 만년에 함양 국계(菊溪)의 제계서재(蹄溪書齋)에서 우거하였다고 전한다.

『함양군읍지』에는 “제계서재(蹄溪書齋)는 군의 남쪽 30리 화장산(花長山) 아래에 있다. 이색이 우거할 때 이 서재가 있었다. 성화연간에 강희맹이 중수하였다.(在郡南三十里花長山下, 李穡寓居時有此齋, 成化間姜希孟重修)”고 전한다. 『함양군읍지』외에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목은집』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제계서재 인근에 남아있는 이색과 관련된 지명과 설화 등이 있어 이와 관련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학문과 저술]

이색은 ‘유종(儒宗)’, 즉 ‘유학의 종장’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인정받았다. 이색은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였다. 이색 문집에는 4,262편의 시와 232편의 산문이 전한다. 조선 후기 이전까지 분량이 가장 많은 문집이다.

[묘소]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396년에 사망하자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충청북도 청주시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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