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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30
한자 晉陽鄭氏
영어공식명칭 Jinyang Jeong Clan
이칭/별칭 진주정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488년 - 정희보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547년 - 정희보 사망
입향 시기/일시 중종 때 - 진양정씨, 정희보 함양에 입향
본관 진양 - 경상남도 진주시
입향지 모간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효리마을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기동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신관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본백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목현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서주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유평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유평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정예|정자우|정장|정헌
입향 시조 정희보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 정예·정자우(鄭子友)·정장(鄭莊)·정헌(鄭櫶) 등을 시조로 하고 정희보(鄭希輔)를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연원]

진양정씨(晉陽鄭氏)는 진주정씨(晉州鄭氏)라 일컫기도 한다. 계파가 복잡하여 동성동본이면서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 또는 중시조로 하는 네 계열이 존재한다. 정예를 시조로 하는 충장공파(忠莊公派) 가계는 정시양(鄭時陽)을 1세조로 하여 정균(鄭均)-정중소(鄭仲紹)-정홍단(鄭洪旦)-정안사(鄭安社)-정수(鄭需)-정수규(鄭守珪)로 이어진다. 정수규는 정연(鄭椽)·정헌(鄭櫶)·정송(鄭松) 세 아들을 두었고, 장자 정연은 정을보(鄭乙輔)와 정길보(鄭吉輔) 두 아들을 두었다. 정을보는 1320년(충숙왕 7)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43년(충혜왕 4) 전민추쇄도감(田民推刷都監) 제조에 임명되었으며, 충목왕 즉위 초에 정당문학과 1352년(공민왕 1)에 찬성사를 역임했다. 정을보의 증손자 정이오(鄭以吾)[1347~1434]는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전교부령 등을 역임한 후 조선 건국 후 태종 연간에 대사성을 지냈다. 정이오의 장자가 정분(鄭苯)[?~1454]이다. 정분은 태종 때 문과 급제한 후 주요 직책을 역임하다가 단종 때 우의정이 되었으나 단종의 왕위를 지키다가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하였다.

정수규의 둘째 아들 정헌(鄭櫶)은 진양정씨 헌계 우곡공파(隅谷公派)의 중시조가 되었다. 이 가계는 정헌(鄭櫶)의 아들 정석(鄭碩)이 정온(鄭溫)[1324~1402]과 정택(鄭澤) 두 아들을 두었다. 정온의 아들은 정염(鄭廉), 정택의 아들은 정의생(鄭義生)이다. 정규수의 막내 아들 정송의 아들인 정장(鄭莊)의 가계는 진주정씨 장계 공대공파(恭戴公派)의 중시조가 되었다. 이 가계는 정장-정자순(鄭子淳)-정설(鄭舌)-정척(鄭陟)[1390~1475]으로 이어지고, 정척이 정효근(鄭孝謹)·정공근(鄭恭謹)·정충근(鄭忠謹)·정양근(鄭良謹)·정성근(鄭誠謹)[1446~1504] 등 다섯 아들을 둠으로써 가세가 번성하였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정자우의 가계는 정자우(호장)-정한여(鄭漢汝)-정거중(鄭居仲)-정국유(鄭國儒)-정인순(鄭仁順)-정신렬(鄭臣烈)로 이어진다. 정신렬은 정현취(鄭玄就)·정중공(鄭仲恭) 두 아들을 두었고, 정현취의 아들은 정진경(鄭晉卿)과 정진황(鄭晉璜)이며, 정중공의 아들은 정신걸(鄭莘傑)이다. 정진경은 정임덕(鄭任德)·정인덕(鄭仁德)·정준덕(鄭俊德) 세 아들을 두었으며, 장자 정임덕은 공민왕 때 지선주사(知善州事)를 지냈다. 정임덕의 세 아들은 정유(鄭愈)[?~1372], 정손(鄭愻), 정근(鄭懃)이다. 정유는 『고려사』 효우(孝友)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정유는 1372년(공민왕 21) 왜구가 하동에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 정임덕과 동생 정손을 보호하며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인물이다. 정유의 장자 정천익(鄭天益)은 문익점(文益漸)[1329~1398]의 장인으로, 목화 재배로 유명한 인물이다.

[입향 경위]

함양군 지역에 진양정씨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송헌(松軒) 정중공(鄭仲恭)의 후손 정희보가 중종 때 경상남도 남해에서 들어와 고을 동쪽 모간(毛看)[수동면 우명리 효리마을]에 거주하면서부터이다. 정희보정여창(鄭汝昌)[1450~1504] 이후 함양 지역에서 성리학을 계승하고 교육한 대표 인물로, 문하에서 노진(盧禛)[1518~1578] 등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조선 후기 진양정씨의 함양 입향은 일곱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모두 진주에서 들어왔다. 현종 때 정신렬의 후손 정인갑((鄭仁甲)은 함양으로 들어와 그 자손들이 백천(白川)[함양읍 백천리]에 거주하였고, 충장공 정분의 후손 정득수(鄭得壽)는 영조 때 함양에 들어와 개평(介坪)[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에서 살았다. 정조 때는 정분의 후손 정우종(鄭佑鍾)이 판문(板門)[유림면 유평리 판문마을]으로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순조 때는 정신렬의 후손 정만환(鄭萬煥)이 유평(柳坪)[유림면 유평리 유평마을]에 정착하였다. 철종 때는 정신렬의 후손 정흥세(鄭興世)가 사구(沙九)[휴천면 월평리]에 들어와 살았고, 고종 때는 정분의 후손 정우재(鄭佑在)와 정우창(鄭佑昌)이 각각 수여(水餘)[지곡면 마산리 수여마을]와 후동(後洞)[함양읍 신천리 후동마을]에 정착하였다.

[현황]

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의 성』에서는 당시 함양군의 집성촌을 소개하면서 진양정씨는 휴천면 목현리에 28세대, 유림면 손곡리에 15세대 정도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지금도 진양정씨는 함양읍 신관리 기동마을과 백천리 본백마을, 휴천면 목현리 목현마을, 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유림면 유평리의 유평마을 및 판문마을 등지에 주로 살고 있다. 2000년의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진양정씨는 전국에 7만 4,777가구 23만 8,505명, 함양군에 177가구 45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는 전국에 32만 4,521명, 함양군에 4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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