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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59
한자 現代
영어공식명칭 Contemporary Time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2년 - 사립함명학교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3월 - 보광당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7월경 - 국민보도연맹 함양군지부 학살 사건 발생

[정의]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역사.

[행정구역]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면은 1957년에 석복면(席卜面)을 편입하여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함양군 안의면의 춘전리·진목리가 경상남도 거창군과 남상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6년 휴천면에 엄천(嚴川)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4년에는 함양군을 관통하는 88올림픽고속도로[현 광주대구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인근지역과의 산업·문화 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1988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의 상동이 운림리로, 하동이 용평리로 개칭되었다. 1993년 교산리 학당(學堂)을 4개 동으로 분동하여 1개 읍과 10개 면을 관할하였다. 1998년 엄천출장소를 폐지하였다. 2018년 기준으로 경상남도 함양군은 724.88㎢의 면적에 1개 읍[함양읍], 10개 면[마천면, 휴천면, 유림면, 수동면, 지곡면,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 백전면, 병곡면], 103개 리, 256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

함양군의 인구는 해방 후 조금씩 증가하다가 1965년 기점으로 계속 줄고 있다. 1970년 이후 인구추이를 보면 1970년 11만 192명, 1980년 8만 2,758명, 1990년 5만 5,009명, 2006년 4만 1,162명으로, 1970~1980년에 24.9%, 1980~1990년에 33.5%, 1990~1995년에 6.9%, 1995~2006년에 17.4%의 인구가 감소하였다. 가구 수는 1995년 1만 6,313가구에서 2013년 1만 9,095가구로 17% 증가하였지만, 가구당 인구는 3명에서 2명으로 감소하였다. 함양군의 인구 변천은 전형적인 이촌향도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교육과 문화]

함양 지역은 조선시대 영남사림의 본거지로 손꼽히던 지역이다. 전통 교육기관으로는 함양향교·안의향교·남계서원·청계서원 등이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2년에 설립된 사립함명학교가 있으며, 중등교육은 1920년 함양공업학교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함양 지역은 2014년 기준으로 유치원 13개, 초등학교 13개, 중학교 6개, 고등학교 4개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함양문화원, 군립도서관, 함양공설운동장 등이 있다. 대표적인 문화제로는 함양문화원에서 1962년부터 매년 5월 군민의 단합과 문화발전을 위해 개최하는 천령문화제(天嶺文化祭)가 있다. 함양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씨름줄다리기가 있다. 특히 함양의 씨름은 유서가 깊고 종류가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양 씨름은 체격에 따라 장사씨름·상씨름·중씨름·애기씨름 등으로 나누는 것이 특징이다. 2013년 기준으로 함양 지역의 의료기관으로는 병원 1개소, 의원 19개소, 치과의원 4개소, 한의원 8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22개소 등이 있다. 사회복지시설로는 아동복지시설 1개소, 노인복지시설 9개소, 장애인복지시설 1개소, 정신질환자요양시설 1개소가 있다.

[역사]

광복 이후 한반도에는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해졌다. 특히 지리산 인근지역인 마천·휴천·유림 주민들은 빨치산과 국군 양측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함양 출신의 하준수[이칭 남도부]는 빨치산과 관련하여 함양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하준수는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출신으로 진주중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사를 폭행하여 퇴학을 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中央)]대학 법학부 재학 중 학도병 징집영장이 나오자 이를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산속에서 100여 명의 학도병 징집거부자들을 규합하여 보광당을 조직하였다. 광복 이후 하준수는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인민당에 참여하여 경상남도 함양군 당위원장 직책을 맡았다. 1949년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되자 제3병단 부사령관을 맡아 태백산 일대에서 빨치산의 유격대를 지휘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태백산·일월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였으나 1954년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되어 1955년 총살형을 당하였다.

국민보도연맹은 남로당 등 좌익단체 가입자들을 자수 전향시키는 동시에 좌익단체의 탈당 성명을 발표한 후 국민보도연맹조직에 가입하게 하였다. 보도연맹은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표방하면서 1949년 4월 20일에 결성된 단체이다. 당시 경찰국 사찰과 발표에 따르면 함양 경찰서에 225명이 자수 전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50년 1월 14일자 자유민보에 국민보도연맹 함양군지부 간사장 정장현, 사무국장 박종두, 총무과장 차금영, 보도과장 차재곤, 조직선전과장 이창호라고 하는 광고가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서 국민보도연맹 함양군지부의 조직체계와 간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좌익 사상이 없는 사람도 빨치산에게 곡식을 빼앗기거나 밥을 해주었다고 하여 동조자로 몰아 가입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마을 이장이 도장을 찍어 달라고 해서 무조건 찍어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을 이장이 도장을 찍어주면 고무신을 준다고 해서 찍어준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본인이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자와 인민군에 동조할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경찰에게 예비검속되어 1950년 7월경 국군이 함양에서 후퇴하기 직전 석복면 남평리 보골·수동면 화산리 밤나무숲·함양읍 백연리 두재고개·지곡면 보산리 가운데고개 등에서 국군에 의해 총살되었다고 한다. 휴전 이후 경상남도 함양 지역 주민들은 공비들에 의해 또 한번 고통을 받게 된다.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리산 일대에 잔류한 북한군과 구 빨치산 및 여순반란 사건 소탕작전으로 입산한 좌익세력 등은 남부군을 조직하여 지리산·덕유산·화문산·백운산 일대에서 후방을 교란하였고, 함양 지역 주민들은 이 가운데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2008년 6·25전쟁 후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구성하여 6·25전쟁을 전후한 희생자들을 일일이 파악하여 진실규명 조사를 실시하고 2010년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을 당한 사실에 대한 확인 결정을 하였다. 함양의 민간인 학살은 6·25전쟁 당시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이은리 당그래산 등지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국군이 집단적으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특히 희생된 민간인의 다수는 30~40대 농민들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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