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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55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 - 함양장터 3.1만세운동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안의장터 3.1만세운동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7년 10월 23일 - 신간회 함양지회 설립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일제강점기 일제의 식민 지배를 극복하여 민족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전개되었던 항일 운동.

[개설]

일제는 1910년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을 막고 조선을 영구적으로 식민 지배하에 두기 위해 무단통치를 하였다. 일제는 조선 지역 전체를 수탈하고 착취하였으며 조선인들은 일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쟁하였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도 다양한 분야 및 계층에서 다양한 형태로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는데, 1919년 3·1운동 이전부터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함양장터 3·1만세운동]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정순귀(鄭淳貴)·노경식(盧璟植) 등이 주도하였다. 함양장터 3·1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1919년 3월 28일의 함양읍 장날에 거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동지를 규합하며 행사를 준비하였다. 태극기를 몰래 준비하여 3월 28일 함양읍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일제의 경찰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달려와서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 인물을 연행해 갔다. 군중은 주동 인물의 연행에 항거하고자 일본군 헌병 분견소로 몰려갔다.

김한익(金漢益)은 통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의거를 결심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919년 4월 2일에 김한익은 큰 태극기를 숨겨 동지들과 함양 장터로 나왔고 낮 12시경에 약 3,000명의 장꾼들이 모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놀란 일제의 헌병이 몰려와 김한익을 검거하자, 군중이 노도같이 일제 헌병 분견소로 몰려가 다시 만세를 불렀다. 이때 군중 속에서 나온 하승현(河昇鉉)이 김한익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함께하였던 윤영하(尹榮夏)도 일제 헌병 분견소로 돌진하자, 일제 헌병이 발포하여 하승현은 즉사하고 윤영하는 총탄에 쓰러졌다.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河在翼)도 모두 총탄에 쓰러졌다.

[안의장터 3·1만세운동]

안의장터 3·1독립만세운동은 전병창(全炳昌)·임채상(林采尙)·정순완(鄭淳完)·전재식(全裁植)·조제헌(趙濟憲) 등이 보산리 급천서당 청년학생 김채호(金采鎬)와 금천리 최석룡(崔碩龍) 등과 안의 장날 의거를 계획하고, 거사일을 1919년 3월 31일로 정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3월 31일, 안의 장날 오후 1시경 안의장터 3·1만세운동 주동자들은 안의장터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려는 순간 일제 경찰에 모두 체포되었다. 오후 2시경 최석룡이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연행된 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 경찰은 거창 수비대에 지원군을 요청하였고 거창에서 일제 군대가 파견되면서 겨우 군중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1920~1930년대 함양 지역 신간회 활동]

신간회는 1927년부터 1931년까지 활동한 민족협동전선으로, 일제가 허가해준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단체였다. 1927년 말에 전국 97개 시·군마다 신간회 지회가 설립되고, 회원 수도 4만여 명에 달하였다. 경상남도 20개 시·군에서도 각기 지회가 조직되었다. 함양 지역에서는 양지환(梁址煥)이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신간회 함양지회는 경상남도 20개 시·군 지회 중에서 12번째로 설립되었고, 창립준비위원은 양지환(梁址煥)·최성준(崔性準)·김성규(金性圭)·조경우(曺景祐) 등이었다. 1920년 8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20년에 이미 창립준비위원들은 함양청년회를 조직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당시 회장에 양지환이 선출되었고, 교육위원은 김용택(金容宅), 산업위원은 노장한(盧章漢)·한정희(韓廷熙) 등이 맡았다.

청년회장 양지환은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함양 지역의 수재였다. 1921년 6월 5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함양청년회 주최로 운동회를 개최하여 약 100원의 찬조금을 모으기도 하였다고 한다. 양지환함양군농회 회장을 겸직하면서 무료로 염색 강습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함양보통학교 학생들을 모집하였는데, 지원자가 너무 많아 스스로가 교실 증축비 2,000여 원을 모으기도 하였다.

양지환을 비롯한 함양청년회 간부 및 회원들은 대부분 신간회 간사와 회원이 되었기 때문에 신간회 함양지회 설립 이후에도 청년들에 대한 여러 가지 사업들은 지속되었다.

신간회에서는 강연회 및 토론회가 수시로 개최되었다. 신문사 지국이나 천도교 사무실 등을 빌려 쓰기도 하고, 회관 건립 후에는 회관 내에서 당시 일본 유학생들을 초대하여 여름과 겨울에 각각 한 차례씩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신간회 회원 중에는 신문지국 경영자 혹은 기자들이 많았다. 도움을 받아 신문·잡지를 구비하여 회원 및 일반인과 같이 정보를 공유하였다. 토론회 및 강연회와 더불어 야학은 당시 신간회의 중요 사업 중의 하나였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도 야학활동은 활발하였다고 한다.

청년들의 신체 건강도 장려하고자 개최된 체육 행사는 친교 및 체력 향상과 더불어 애향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체육행사 이외에도 각종 웅변대회·음악회·연극회 등도 개최하였다.

여러 가지 활동에도 불구하고 신간회 함양지회는 경남의 다른 단체들이나 서울지부와의 연계 등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양지환이 개인자격으로 조선 청년 연합회에 참가한 것이 전부였다. 1930년대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신간회 총회 및 간사회가 개최될 수 없었다. 신간회 함양지회 또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와 같은 궤를 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 및 영향]

3·1운동 시기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는 사망자 3명, 부상자 12명, 투옥자 20명 그리고 안의는 사망자 6명, 부상자 15명이었다. 이 외에도 수십 명이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지하에서 활동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 외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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