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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24
한자 沙斤驛
영어공식명칭 Sageunyeo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행 시기/일시 1438년연표보기 - 사근역, 사근도의 본역으로 개설
폐지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사근역 폐지
개정 시기/일시 1457년 - 사근역, 김천도를 사근도에 통합
관할 지역 사근역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지도보기
법령과 제도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에 있었던 고려시대 산남도와 조선시대 사근도의 중심 역참.

[관련 기록]

사근역은 『고려사』 권82 병지2 참역(站驛)에서 “산남도는 28개의 역을 관할하는데,…… 사근【이안】[山南道掌二十八……沙斤【利安】]”으로 처음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신증동국여지승람』 31권 경상도 함양군 역원에는 “사근역 군 동쪽 16리에 있으며,…… 승 1인 있다[沙斤驛在郡東十六里……丞一人]”, 『여지도서』 함양읍 역원에는 “사근역은 부의 동쪽 16리에 있다. ……승 1인이다[沙斤驛在府東十六里……丞一人]”, 『경상남도읍지』「함양군읍지」(1832)에는 “사근역은 군의 동쪽 16리에 있으며, 승 1인이다[沙斤驛在府東十六里 丞一人]”라고 각각 기록되어 있다. 『영남역지(嶺南驛誌)』 부사례에는 “사근도……본역은 함양군 동쪽 16리 사근면에 있으며, 민호는 211호이다[沙斤道……本驛在咸陽郡東十六里沙斤面, 民戶二百十一戶]”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사근역은 고려시대 산남도의 28개 역참 중 한 곳이자, 조선시대 경상우도 사근도의 본역이다. 사근역은 산청에서 함양으로 이어진 역로에 있었다. 서쪽으로 제한역, 동쪽으로 산청군 정곡역으로 연결되었다. 사근역의 현재 위치는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로 추정되는데, 『구한말한반도지형도(舊韓末韓半島地形圖)』에 ‘사근역’이라 명기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근역은 1380년(우왕 6) 금강 하구의 진포를 침입한 왜구가 상주부고(尙州府庫)를 불태운 후 주둔한 곳이었다. 고려시대 문신인 이첨은 이 참상을 “운봉산 밑에는 가을 바람이 이르고, 햇살이 엷고 날씨가 추우니 나뭇잎이 마른다. 이때에 우리 군사가 왜놈에게 패하여, 피를 함양 언덕의 풀에 뿌렸네. 양부의 원수가 진(陳) 앞에서 죽었으니, 하찮은 군사들이야 신명 보전도 어려웠으리라. 슬픈 노래 두어 곡조에 장부도 눈물지으며, 늙기 전에 국치를 씻으리라 맹세하였네. 남쪽으로 출정한 장수 누가 군사 없으랴마는, 깃발도 천천히 갔던 길 돌아가도다”라고 시로 표현하였다. 16세기 이후 조선시대 역의 운영과 규모는 대체로 역역 부담 과중과 역노의 도망 등 다양한 사유에 의해 변동이 빈번하였는데, 사근역도 마찬가지였다. 1747년에 작성한 『사근도형지안(沙斤道形止案)』에는 역리 641명, 역노 117명, 역비 90명, 일수 7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756년 전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역리 609명, 역노 90명으로 기재되어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변천]

사근역은 994년(성종 13) 이후 어느 시기에 설치되었다가, 1438년(세종 20) 사근도의 본역이 되었고, 역승 1인을 두었다. 1457년(세조 3)에는 김천도가 사근도에 통합되면서, 역승을 혁파하여 6품 외관직인 찰방을 사근역에 배치한 것으로 전한다. 사근역은 1896년(고종 33)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따라 사근도와 함께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사근역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함양군과 그 주변을 연결하는 옛길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참 시설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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