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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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請斬普雨疏 |
영어공식명칭 | A Request To Kill A Buddhist Monk Named Bowoo |
이칭/별칭 | 「승려 보우를 참해야 한다는 상소」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32년 1월 9일 - 「청참보우소」 저자 전경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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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85년 10월 9일 - 「청참보우소」 저자 전경창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59년 - 『계동집』 간행 |
배경 지역 | 「청참보우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성격 | 주소류|소문 |
작가 | 전경창 |
[정의]
조선 전기 대구 출신의 학자인 전경창이 승려 보우를 참하여야 한다고 올린 상소문.
[개설]
「청참보우소(請斬普雨疏)」의 저자 전경창(全慶昌)[1532~1585]의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자는 계하(季賀)이고, 호는 계동(溪東)·만오(晩悟)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인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전순(全珣)이고, 어머니는 김해송씨(金海宋氏) 송식(宋軾)의 딸이다.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이다. 16세기 후반부터 대구 지역의 유학은 이황의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전경창은 이황의 성리학을 대구에 전파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숙량(李叔樑)[1519~1592], 정구(鄭逑)[1543~1620] 등과 교유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溪東集)』이 있다.
보우(普雨)[1509~1565]는 조선 전기의 승려이다. 보우의 호는 허응(虛應)·나암(懶庵)이고, ‘보우’는 법명이다.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지지를 기반으로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 중흥을 위하여 힘썼다.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부활시키고 과거에 승과(僧科)를 포함시켰다. 1565년(명조 20) 4월에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행하였지만 4월에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가 죽자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전국 유림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후 보우는 승직이 박탈되고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邊協)[1528~1590]에 의하여 참형(斬刑)되었다.
전경창은 1565년(명종 20) 8월에 김우굉(金宇宏)[1524~1590], 조휘(趙徽)[1543~?], 고응경(高應擎)[1524~?], 이희(李熹), 이인수(李仁壽), 여응구(呂應龜)[1523~1577]와 함께 보우를 참하라는 소를 20여 일 동안 연이어 올렸다. 전경창은 3회에 걸쳐 상소하였다.
『국역 계동선생문집(國譯 溪東先生文集)』에 수록된 「청참보우소」의 이칭은 「승려 보우를 참해야 한다는 상소」이다.
[구성]
「청참보우소」는 1565년 8월 4일부터 25일에 걸쳐 승려 보우를 참하여야 한다고 연이어 올린 소(疏) 가운데 하나이다. 전경창의 상소는 3회에 이른다. 『계동집(溪東集)』에는 「청참보우소(請斬普雨疏)」, 「재소(再疏)」, 「삼소(三疏)」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
「청참보우소」, 「재소」, 「삼소」의 주된 주장은 “공론(公論)을 받아들여 승려 보우를 참하여야 한다.”라는 것이다.
「청참보우소」에서 전경창은 보우의 죄를 열거하고 반드시 참하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며 왕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재소」에서는 문정왕후의 죽음을 보우의 책임으로 돌리고, 천륜의 지극한 정(情)인 효(孝)와 관계 지어 자식 된 본분을 다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보우를 요승(妖僧)으로 칭하며, 공론의 간절함을 전하고 있다. 「삼소」에서는 사사로운 정으로 특정인에게 마음을 보이는 편사(偏私)를 버리고 공론을 받아들여 천명의 떳떳함을 밝히기를 바라며 왕에게 진언하고 있다.
[특징]
「청참보우소」는 상소의 내용이 완곡한 듯하면서 사례의 제시가 직설적이다. 자문자답하기도 하고, 질문에 대한 왕의 대답을 가설하여 공론의 당위성을 이끌고 있다. 또한 세 편 모두 다양한 용사(用事)를 활용하여 상소의 명분을 끌어올리며 왕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의의와 평가]
「청참보우소」를 포함한 20여 회에 걸친 상소에 대한 내용은 실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명종 20년 8월 기사에 실려 있지 않다. 단지 “경상도 유생인 진사 김우굉 등이 보우를 죽이라고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대표자 김우굉의 이름과 상소한 사실에 대한 기록뿐이다. 『계동집』에 수록된 전경창의 상소 세 편은 당시 유림들의 공론의 사정과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