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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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松巖遠慶輓 幷詞 |
영어공식명칭 | Grieve Over The Death Of Yi-Wonkyung Of Songam |
이칭/별칭 | 「이원경 만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32년 1월 9일 - 「이송암원경만 병사」 저자 전경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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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85년 10월 9일 - 「이송암원경만 병사」 저자 전경창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59년 - 『계동집』 간행 |
배경 지역 | 파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성격 | 애제류|만사 |
작가 | 전경창 |
[정의]
조선 전기 대구 출신의 학자인 전경창이 이원경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사.
[개설]
「이송암원경만 병사(李松巖遠慶輓 幷詞)」의 저자 전경창(全慶昌)[1532~1585]의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자는 계하(季賀)이고, 호는 계동(溪東)·만오(晩悟)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인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전순(全珣)이고, 어머니는 김해송씨(金海宋氏) 송식(宋軾)의 딸이다.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이다. 16세기 후반부터 대구 지역의 유학은 이황의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전경창은 이황의 성리학을 대구에 전파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숙량(李叔樑)[1519~1592], 정구(鄭逑)[1543~1620] 등과 교류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溪東集)』이 있다.
이원경(李遠慶)[?~1571]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택선(擇善)이고, 호는 송암(松巖)이다. 조선 전기 경상북도 칠곡 출신의 유생이다. 이윤우(李潤雨)의 종조부이다. 평생을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이송암원경만 병사」의 이칭은 「이원경 만사」이다.
[구성]
「이송암원경만 병사」는 칠언율시(七言律詩)인 만사(輓詞)에 사(詞)를 겸한 작품이다. 사 아래에 만사가 있다.
[내용]
「이송암원경만 병사」의 사는 병으로 생을 마감한 이원경의 죽음을 슬퍼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래는 사 뒤에 이어지는 만사의 전문이다.
여군상식십래년(與君相識十來年)[그대와 더불어 서로 알고 지낸 10여 년 동안]
교도상응담수연(交道相應淡水然)[도로 교유하며 상응함이 맑은 물과 같았네]
누항일생수고절(陋巷一生修苦節)[누항에서 보낸 일생 동안 고되게 절개 지키며]
시서천고모전현(詩書千古慕前賢)[시서로 천고의 옛 현인들 연모하였네]
미종혼가정하극(未終婚嫁情何極)[끝내 사돈 맺지 못한 마음 어찌 한량 있으리]
영결자친루자현(永訣慈親淚自泫)[모친께서 영결하니 눈물이 절로 깊은 내 이루네]
지유양남능간고(知有兩男能幹蠱)[두 아들이 능히 잘 이어받을 것을 알기에]
고문타일경종천(高門他日慶從天)[높은 가문에 훗날 하늘의 경사 있을 것이네]
[특징]
「이송암원경만 병사」의 사는 한 구를 4자로 맞춘 글이다. 안회(顔回)와 도잠(陶潛)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원경을 품평하였다. 만사는 ‘선(先)’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이송암원경만 병사」는 사의 구법상 일정하지 않은 구(句)의 장단을 4자로 일정하게 맞추어서 소화를 풀고 있다. 그리고 사와 만사가 구분되어 있으나 실제 연결된 하나의 작품이라 하여도 무방할 만큼 감정의 술회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글이다. 이원경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내며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