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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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處訥 墓碣銘 |
영어공식명칭 | Son-Chunul Myogalmyeong by Jeong-Ho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97년 - 「손처눌 묘갈명」 저자 정호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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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34년 - 「손처눌 묘갈명」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55년 - 「손처눌 묘갈명」 저자 정호인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모당집』 간행 |
배경 지역 |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 |
성격 | 비지류|묘갈명 |
작가 | 정호인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의 청호서원에 제향된 정호인이 지은 손처눌의 묘갈명.
[개설]
「손처눌 묘갈명(孫處訥 墓碣銘)」의 저자 정호인(鄭好仁)[1597~1655]의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자는 자견(子見), 호는 양계(暘溪)이다. 어린 시절 손처눌(孫處訥)[1553~1634]에게 수학하였고, 장현광(張顯光)[1554~1637]을 스승으로 모셨다.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왔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계문집(暘溪文集)』이 있다.
손처눌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청호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구성]
「손처눌 묘갈명」은 손처눌의 성명, 세계(世系), 성품, 행적, 장례의 연원일, 자손 개황과 명(銘)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아래는 「손처눌 묘갈명」의 명(銘)이다.
“락선호학(樂善好學)[선을 즐기고 배움을 좋아하며]
수도안빈(守道安貧)[도를 지키고 가난에 편안하였네]
덕유어기(德裕於己)[덕은 자기 내면에 넉넉하였고]
계아후인(啓我後人)[우리 후인들을 일깨워 주셨지]
전형이원(典刑已遠)[전형이 이미 멀어졌으니]
오장안방(吾將安倣)[우리는 앞으로 누구를 따를까]
삼척단갈(三尺短碣)[세 척의 짧은 비석이지만]
백세첨앙(百世瞻仰)[백세토록 우러러 바라보네]”
[특징]
「손처눌 묘갈명」 명부(銘部)의 상부 4행은 평성인 ‘진(眞)’ 계열의 운목이 사용되었다. 하부 4행은 환운(換韻)되어 상성인 ‘양(養)’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사언체(四言体) 고시이다.
[의의와 평가]
「손처눌 묘갈명」은 서사를 위주로 하는 묘갈문의 정체(正體)라 할 수 있다. 공덕 찬양보다는 사실 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명(銘)은 손처눌의 일생의 공업(功業)을 사언구로 축약하여 효과적으로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