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83 |
---|---|
한자 | 輓徐樂齋行甫 |
영어공식명칭 | Manseonakjaehaengbo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만서낙재행보」 저자 손처눌 출생 |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만서낙재행보」 저자 손처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모당집』 간행 |
배경 지역 |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79-4] |
배경 지역 |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산격동 산79-1] |
성격 | 한시|칠언율시 |
작가 | 손처눌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서 구국 활동과 강학 활동을 한 손처눌이 서사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지은 만시.
[개설]
「만서낙재행보(輓徐樂齋行甫)」의 저자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서사원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기(壬辰倭亂期)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 곽재겸, 손처눌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구성]
「만서낙재행보」는 칠언율시(七言律詩) 3수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만서낙재행보」 세 수 가운데 첫 번째 수이다.
동문동군우동시(同門同郡又同時)[같은 문하 같은 고을, 그리고 같은 때에]
정의상부출등이(情義相孚出等夷)[정과 의리 미덥기가 무리에서 뛰어났네]
합석경오충고우(合席敬吾忠告友)[자리할 때는 나를 충고의 벗으로 공경하였고]
련상의자환성사(連牀擬子喚醒師)[공부할 때는 그대 일깨워 주는 스승 같았지]
영상척독시침법(盈箱尺牘施鍼法)[상자 가득 편지 침을 베푸는 법과 같고]
련첩경장구약사(聯帖瓊章救藥詞)[주고받은 옥 같은 시 약과 같은 말이네]
굴지평생하인설(屈指平生何忍說)[평생을 손꼽아 보니 어떻게 차마 말하랴]
중천통곡구용의(重泉慟哭舊容儀)[저승길 통곡하며 옛 모습 떠올려보네]
[특징]
「만서낙재행보」는 ‘지(支)’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만서낙재행보」는 평생의 지기(知己)였던 서사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지은 만시이며, 함께한 시절에 대한 회상을 통하여 슬픔을 애절하게 노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