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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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輓郭槐軒益甫 |
영어공식명칭 | A Poem Written In Mourning For Kwak-Goeheon's Death |
이칭/별칭 | 「곽괴헌 만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만곽괴헌익보」 저자 손처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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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만곽괴헌익보」 저자 손처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모당집』 간행 |
배경 지역 |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 |
성격 | 한시|칠언율시 |
작가 | 손처눌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서 강학 활동과 의병 활동을 한 손처눌이 곽재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
[개설]
「만곽괴헌익보(輓郭槐軒益甫)」의 저자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조선 후기 의병장이었던 곽재겸의 호는 괴헌(槐軒)이고, 자는 익보(益甫)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1538~1593]을 찾아가 모병과 군량 수집에 많은 방략(方略)을 제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을 이끌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사촌 동생 곽재우(郭再祐)[1552~1617]와 함께 적을 방어하고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난이 끝나고 향리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대구의 유호서원(柳湖書院)에 제향되었다.
「만곽괴헌익보」의 이칭은 「곽괴헌 만사」이다.
[구성]
「만곽괴헌익보」는 칠언율시(七言律詩) 한 수(首)와 고시(古詩) 한 수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두 수 중 칠언율시의 내용이다.
온온덕량고인난(溫溫德量古人難)[인격과 도량의 온화함은 옛사람도 어려웠는데]
심치망생칠십완(深恥忘生七十完)[망생 몹시 부끄러워하며 일흔 온전히 하였네]
화기이성개성질(和氣怡聲皆性質)[조화로운 기운과 기쁜 목소리 모두 성품이오]
서인충기양심간(恕人忠己揔心肝)[남에게 인자하고 자기에 충실함은 다 본심일세]
청양매타회금령(靑陽每唾懷金令)[젊었을 때는 매양 금을 품은 수령에게 침 뱉고]
백수환참정옥관(白首還慚頂玉官)[나이 들어서는 옥관자 한 벼슬을 부끄러워하였네]
명의여금수화진(命矣如今雖化盡)[명이로구나! 지금은 비록 목숨이 다하였지만]
응서죽백한유관(應書竹帛漢劉寬)[응당 죽백에 한나라의 유관처럼 이름 남겨지리]
나머지 한 수인 고시는 곽재겸과 서사원의 죽음을 슬퍼한 시이다. 평소 학문적 동지였던 두 벗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는 내용이다.
[특징]
「만곽괴헌익보」는 ‘한(寒)’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만곽괴헌익보」는 손처눌이 곽재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지은 만시(輓詩)이다. 곽재겸 평생의 행적을 8행의 한시로 축약하여 노래한 작품이다. 각 행에 곽재겸의 인품을 노래하였는데, 2행의 ‘망생(忘生)’은 ‘망생순욕(忘生循欲)’의 준말이며, 중국 송나라 정이(程頤)[1033~1107]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생(生)의 중함을 잊고 욕망만 따름을 매우 부끄러워한 곽재겸의 성품을 드러내었다. 경련(頸聯)에서는 온화한 성품과 달리 관리에게 강직하게 처신한 모습과 벼슬에 얽매이지 않는 곽재겸의 모습을 그렸다. 실제 곽재겸은 1573년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천거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하였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 누차 벼슬을 하사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8행의 한나라 유관(劉寬)은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유관의 용사(用事)를 활용하여 곽재겸의 인품을 칭송하며 시를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