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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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甲午日記 |
영어의미역 | Diary of 31st Year of the Sexagenary Cycle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배항섭 |
[정의]
1894년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유생 이면재가 쓴 일기.
[개설]
조선 말기 충주 지역(당시 청풍)에 살던 이면재(李冕宰)는 한말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유인석 등과 교류하였다. 이면재는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을 뒤따라 1896년 6월부터 서울을 경유, 황해도·평안도를 거쳐 서간도로 가서 이듬해 1월 제천으로 되돌아올 때까지의 일정을 기록한 『서행일기(西行日記)』의 저자 이조승(李肇承)의 족숙(族叔)이기도 하다.
[서지적 상황]
『갑오일기』는 1994년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이 한말 호서 지역 주요 의병장들의 격문과 일기, 서간문 등을 번역하여 편찬한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에 번역문과 원문이 함께 실려 있다.
[구성/내용]
『갑오일기』에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이 4월부터 나타난다. 4월 11일 일기에서 이면재는 전주에서 농민군이 일어난 사실, 평소에 혐의가 있던 토호들이 봉욕을 당하고 있으며, 각 고을의 병기를 빼앗아 무장한 농민군들이 수령까지 징치하고 있다는 것,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얼마 전에 경병 1,000여 명이 전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7월 16일에야 6월 27일 발간된 관보를 입수하여 읽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평소에도 서울을 비롯한 기타 지역의 소식을 그만큼 늦게 입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파병하여 주둔하게 된 사실은 이면재에게도 비교적 바로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날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로 무력 점령한 사실을 6월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무렵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의 전투, 청군의 패주, 패주한 청군이 충주로 들어온 일, 충주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의 행패와 충주군수가 청군에게 군량전을 준 일 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밖에도 『갑오일기』에는 7월 14일 이후 충주 읍내에서 1,000여 명의 농민군이 모여 “앞으로 왜놈이 도처에 가득 찰 것이다”라고 하며 근처의 동네 곳곳에 보루를 쌓은 일, 이때 충주의 농민군을 이끌고 있던 성두한에 대해 “모든 백성이 다 존경한다”고 한 풍문, 7월 23일경부터 충주 지역 농민군이 본격적으로 폐정 개혁활동을 전개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갑오일기』에는 1894년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충주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상이 잘 기록되어 있어서, 충주와 그 일대 동학농민군의 활동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