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75
한자 晉陽河氏三人旌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23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연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16년연표보기 - 하맹보 정려 건립
건립 시기/일시 1797년연표보기 - 하원룡 정려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하필명 정려 건립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231 도천마을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 진양하씨 삼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정려.

[위치]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의 도천마을에 있다.

[변천]

진양하씨 삼인정려우계(愚溪) 하맹보(河孟寶), 하원룡(河元龍), 하필명(河必明)의 정려이다.

하맹보는 어려서부터 옥계 노진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우애가 두터웠다. 아버지가 병이 나자 대변을 맛보았고 하늘에 병이 낫기를 빌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으며,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제사에 올릴 고기가 없자 노루가 스스로 찾아왔다고 전한다. 상을 마치고도 아침저녁으로 예를 갖춰 사당을 찾았다. 임진왜란 때 법도에 맞춰 신주를 봉안하고 제기를 감추었다. 63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효행이 알려져 1616년(광해군 8)에 정려가 내려지고 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하원룡은 하맹보의 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다. 일찍이 어머니가 병이 나자 대변을 맛보며 병의 차도를 보았고, 손가락 피를 받아 올리며 기도를 하였다. 아버지 나이 80세에 풍비병(風痺病)을 앓게 되자 몸소 병수발을 들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에게 “내 몸이 불편하여 죽은 이처럼 지냈는데 나의 욕구를 헤아리고 보살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모두 너의 효성 때문이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며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의 효성이 알려져 1797년(정조 21)에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다.

하필명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진중하여 망언을 하지 않았다. 가난하여 부모가 병이 있을 때 약을 구하지 못하자, 이웃들이 그 효성을 알고 도왔다.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한결같이 성묘하며 슬퍼하였다. 양친이 별세하자 과거를 그만두고 돌아와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쳤으며, 임종 때 아들에게 부모의 산소 곁에 묻어 달라 하였다. 이런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었고 1873년(고종 10)에 정려되었다.

[형태]

각각의 비각에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각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다. 중앙의 비석에는 하맹보의 효행을 기록한 ‘효자 처사 우계 하맹보지려(孝子處士愚溪河孟寶之閭)’가 있고, 오른쪽에는 ‘효자 학생 하원룡지려(孝子學生河元龍之閭)’가, 왼쪽에는 ‘효자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하필명지려(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河必明之閭)’가 있다. 비문은 함양군수 철성 이성길(李成吉), 숭정대부 행 예조판서 민종현(崇政大夫行禮曹判書 閔鍾顯), 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안동 김세균(崇祿大夫行吏曹判書 安東 金世均)이 각각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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