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선사의 자취를 따라 화과원을 거닐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19
한자 龍城禪師-華果院-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동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0년 8월 31일 - 함양백룡성선사화과원유허지, 경상남도 기념물 제229호로 지정

[정의]

근대 고승인 용성 선사의 불교혁신과 자주성의 실천 현장이었던 화과원을 추적한다.

[개설]

조선 500년의 숭유억불 정책은 불교계의 전반적인 쇠퇴를 가져왔고, 민초들의 기복 종교로서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사찰은 점차 깊은 산중으로 물러나고, 승려들은 사대부의 멸시를 받으며 굴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그 결과 조선불교의 법맥은 단절되거나 혹은 깊은 산속의 일부 승려들에 의해 간신히 전승되었다. 개항 이래, 특히 일제 강점기에 왜색(倭色)불교가 세력을 확대하던 조선불교계에 자주와 혁신을 주창하고, 이것을 실천하고자 했던 이가 바로 용성(龍城) 선사이다.

[일생을 조선불교의 자주성을 위하여]

용성 선사[이하 ‘선사’ 생략]는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의 수원백씨(白氏)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밀양손씨는 “찬란한 가사를 입은 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출산하였다고 한다. 1877년[14세]에 1차 출가를 하고자 할 때도 현몽은 있었다. 용성에게는 ‘법을 부촉한다’는 내용으로, 스승이 될 덕밀암(德密庵)의 주지 혜월(慧月)에게는 ‘환성 지안(喚惺志安)’의 법맥을 계승할 사람이 찾아올 것이란 내용이었다고 전한다. 혜월은 그에게 ‘진종(震鐘)’이란 법명과 ‘용성’이란 법호를 주어 출가를 허락하였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국 환속하였다.

용성은 2년 후인 1879년[16세]에 혜월의 도움으로 합천 해인사 극락암의 화월(華月)을 은사로, 혜조(慧造)를 계사로 정식 출가를 하였다. 이후 해인사에서는 수행자로서 기본만 배우고,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하였다. 1884년에 금강산 표훈사에서 무융(無融) 선사의 지도로 2차 깨달음을 얻자, 무융 선사는 용성에게 구족계를 갖출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용성은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禪谷) 율사에 의지하여 구족계를 이어나갔다. 1886년에 4차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용성은 20여 년에 걸쳐 자신의 깨달음을 철저히 검정하며 세속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병탄이란 국난, 왜색불교를 비롯한 외래종교의 급성장으로 조선불교가 몰락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용성은 더 이상 산중의 보임(補任)에 전념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용성은 조선불교의 정통성과 선불교의 대중화 등을 위하여 세상 속으로 적극 뛰어들게 된다. 1910년 7월, 용성은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불교가 여타 종교보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조선불교계의 일각에서 식민당국의 불교 정책에 대항해서 정통의 임제종을 선양하고, 조선불교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적극 참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19년 3·1만세운동 때에는 만해(萬海)와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결과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자주적인 임제종의 기풍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선학원이 개설될 시기와 1925년 6월에 도봉산 만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를 추진할 때도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0년대 중반, 조선불교계는 ‘대처’와 ‘육식’으로 대표되는 왜색불교가 더욱 만연하였다. 특히 대처 유학승들은 1925년 가을부터 총독부와 결탁하여 사법(寺法)을 개정하여 조선불교계를 장악하려 하였다. 용성 선사는 1926년 5월과 9월의 두 차례에 걸쳐 비구들의 대처와 육식을 금지해달라는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하지만 이 건의가 수용되지 않자 기존의 교단에서 더 이상 불교개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인사와 범어사에 있던 자신의 승적을 버렸다. 이후 혁신 불교의 실천을 위하여 1927년에 ‘대각교’를 선언하고, 교단의 자립성을 확립하기 위해 『백장청규(百丈淸規)』에 근거한 ‘선농불교’를 주창하였다. 또한 이를 위한 방편으로 만주의 용정에 선농당(禪農堂)을, 경상남도 함양에 화과원(華果園)을 건설하였다. 이처럼 용성이 이끄는 대각교가 일제의 종교정책에 굴복하지 않고 국내외적으로 교세를 확대해가자,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일제는 대각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하며 더욱 노골적으로 탄압을 하였다. 더 이상 대각교가 독립적인 교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용성은 범어사와 묵약(黙約)을 맺고, 1938년 4월경에 법적으로 용정의 대각교당과 농장을 해체하였다.

이후 용성은 함양의 화과원에서 여생을 의탁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1940년 2월 24일[음력, 세수 77세, 법랍 61세]에 서울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에서 입적하였다.

[혁신과 자주의 기반, 화과원을 개척하다.]

용성은 1927년에 조선불교계의 혁신과 자립을 위하여 경상남도 함양군 백천면 백운산에 ‘화과원’이란 총림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용성은 일찍이 1910년대 초반부터 이미 조선불교계의 자립성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 같은 사실은 1932년 3월 잡지 『불교』에 투고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대각(大覺)께서 우리들[吾人]의 상농(商農)을 금지(禁)하였으나 지금(現今)은 도저히 걸식할 수 없게 되었다. 아 -, 우리는 광이[괭이] 들고 호무[호미] 가지고 힘써 노동하여 자작자급 하고, 타인을 의뢰치 말자. 나(余)는 이것(此)을 각오한 지가 20년 전이나 형세가 부득이하여(勢不得已) 하지 못하고 있다가 …….” 용성은 교조 석가가 수행자들이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계율로 금지하였지만, 이것이 1910년대 초반의 조선 현실과 부합하지 않아 승려들이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을 시행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고 있다.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려는 정책이 강화되었고, 조선불교계에서도 점차 대처와 육식을 하는 승려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용성은 1922년 출옥하였고, ‘본각의 오묘한 본성[本覺妙性]’을 뜻하는 ‘대각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조선불교계에서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용성은 1927년부터 독자적으로 대각교를 설립하고, 기존의 불교교단과 다른 자주적이고도 혁신적인 실천방안을 추진하였다.

용성은 먼저 만주의 용정에 거금 3만 3,000원을 들여 70여 향(晌)의 토지를 구매함으로써 이를 위한 물적(物的)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927년 9월에 처음으로 해외에 재가불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각교당을 설립하고, 인근 명월촌(明月村)과 영봉촌(寧鳳村)의 2곳에 농장을 운영하였다. 당시 용정의 대규모 토지 매입은 궐내에서 생활하였던 후궁(后宮)이나 상궁들의 경제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찍이 1922년에 용성이 출옥하였을 때 서울의 봉익동에 대각사를 마련해 주었고, 그 후로 만주의 용정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함양의 백운산화과원을 설립할 때도 아낌없이 재정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대 후반에 용성의 권유로 화과원에서 수행하였던 조용명의 증언이나, 1940년경에 화과원의 부동산 소유권자로 용성과 함께 상궁이었던 최창운(崔昌雲)·고봉운(高鳳雲) 등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용성은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과 농장을 설치한 후, 국내에서도 이런 물적 기반을 갖추고자 하였다. 용성은 인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유리하고, 자립적인 사원경제의 구축에 넓은 토지가 필요하며, 일제의 감시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던 자신의 생가인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인근의 경상남도 함양 백운산화과원을 설립하였다. 화과원을 설립하고 난 후에 용성은 이곳을 중심으로 혁신 불교를 추진하며 자신의 여생을 의탁하고자 하였다. 용성화과원에서 사원경제의 자립을 강조하며 선농불교를 주창하고, 선원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1931년쯤 화과원에 머물렀다고 하는 조용명은 “판때기에다 한문으로 함양군 백전면 화과원, 옆에다 선원이라고 써 놨다”고 증언하였다. 초창기의 화과원에는 통도사 출신으로 방한암의 제자인 조용명, 20여 년 용성을 시봉하였던 상좌 표회암(表檜庵), 해인사 출신으로 용성의 법을 계승한 김경성(金警惺) 등이 용성의 지도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용성의 제자들과 형제뿐만 아니라 인근의 주민들도 과수원의 개간에 적극 동참하였고, 한편으로 이곳에서 마을 아이들에게 교육 계몽을 시행하면서 수행과 생활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화과원의 사세(寺勢)는 점차 확대되어 설립 초기에 수만 평[30여 정보] 규모의 토지가 1940년경에는 임야 136정보를 포함해 총 44만~49만 평으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국내외적으로 조선불교의 자주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대각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하고 강하게 탄압하였다. 1935년 7월에 서울의 대각교를 해산하였던 용성은 더 이상 독자적으로 용정과 함양의 물적 기반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이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법적으로나마 범어사로 이전하였다. 1936년의 『불교시보(佛敎時報)』17호에는 이와 관련하여 “본 교당[當敎堂]과 기지(基地) 건물 및 토지와 또 함양 잇는 화과원의 기지 및 건물·과수원과 간도 용정촌에 잇는 교당 및 부동산 임야·토지[이상 현시가 10만 원가량]를 모다 범어사에 헌납케 되엇슴으로 범어사에서는 그 대신 매월 초에 100원을 경성포교소에 지불하야 경비에 충당케 하였다”고 전한다. 비록 화과원이 범어사로 이전되고 1940년 음력 2월에 용성 선사가 입적하였지만 함양의 화과원, 특히 선원은 계속하여 운영되었다.

용성의 입적 후에 선원을 책임지고 운영하였던 사람은 3·1운동 이전부터 용성과 인연을 가졌던 이선파(李仙坡)였다. 박영담(朴影潭)·박고남(朴杲南)·이대석(李大石), 양재국(梁載國)·변봉암(邊峯庵)·이능혜(李能慧)·서선월(徐禪月) 등도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변봉암은 1936년에 용성에게 전법게를 받고, 1937년부터 화과원의 선원에서 안거를 시작하였다. 변봉암은 용성의 입적 후인 1940년대 초반까지 원주·입승 등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성의 입적 이전인 1939년에는 총 18명[하안거 9명, 동안거 9명]의 대중이 선원의 안거에 참여하였고, 입적 후인 1940년에는 총 20명[9, 11]이, 1941년에는 총 19명[8, 11]이, 1942년에는 총 21명[14, 7]이, 1943년에는 11명이 하안거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1943년 하안거까지의 기록이나 조실이었던 이선파가 소임을 마치고 선암사로 간 것이 해방 직전이라는 것을 볼 때, 화과원의 선원은 해방 직전이나 아니면 해방공간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화과원이 전하는 의미]

경상남도 함양 백운산화과원은 단순한 의미의 과수원이나 농장이 아니다. 시인 김달진은 1934년 4월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운악(雲岳)을 은사로 득도하고, 1935년부터 화과원에서 용성이 번역한 『화엄경』을 윤문하였다. 일찍이 김달진은 화과원이 불교의 화엄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불화엄(佛華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다. 즉 “‘화(華)’는 보살의 만행(萬行)을 꽃에 비유한 것”이고, “‘과(果)’는 만행을 고루 갖춘 불과(佛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용성이 이곳을 화과원이라 하였던 것은 중국의 백장 회해(百丈懷海)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선농일치의 불교관과 자급자족의 경제관에 기반한 불교적 이상향을 지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933년에 심두섭은 용성을 직접 면담하고 『조선불교』89호에 “6년 전 경상남도 함양군 백양산에 가서 산림·황무지 등 수만 평을 매입해 그것을 개간하고, 과수·야채·마령[감자] 등을 재배하고, 자급자족의 정신으로 일하고, 옆 촌락의 빈민 아동을 모아서 교육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자연과 함께 여생을 보낼 예정입니다. …… 이후에는 신도의 힘에 의해서 생활해 가려 한다면 매우 잘못입니다. 이후 승려는 모름지기 스스로 일해서 스스로 먹는 소위 자신의 힘으로 생활하는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의식을 할 때면 불교의 의식은 일절 멈추고, 가사 등도 입지 않고, 하얀 주의(周衣)를 입은 채이다. 독경·좌선 등은 있지만 불상을 안치하지는 않는다. …… 좌선은 임제선을 취하고 있다. …… 백양산은 작은 집뿐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내용의 글을 투고하였다.

이 짧은 문장에는 왜곡된 기성불교와 다른 용성이 지향하였던 화과원의 설립 목적이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용성은 기존의 승단에서 신도들에게 의지하는 생활상을 벗어나 산림·황무지의 개간으로 감나무·밤나무 등을 심어서 자급자족의 사원경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존의 혼잡한 불교 의식을 모두 없애고, 승려도 가사를 입지 않고, 불전에 불상도 모시지 않고 ‘원[○]’만 그려두는 등 혁신적인 내용을 추구하였다. 이곳에서는 임제선의 수행을 중시하면서도 『법화경』·『화엄경』·『열반경』 등을 독경하는 독자적인 ‘총림(叢林)’을 지향하였던 것이다. 변봉암은 「용탑선원 창건기」를 찬술하면서 용성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40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중에서 화과원과 관련 있는 사람들로는 김경성·표회암·이선파·변봉암·조용명 등이 있는데, 이들은 그동안 한국불교사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용성은 스스로도 화과원에 머물며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용성화과원에 머물며 1937~1938년까지 1928년에 한글로 번역하였던 『대방광불화엄경』을 다시 번역하고, 『청공원일(晴空圓日)[1933]』·『오도(吾道)의 진리[1937]』·『오도(吾道)의 각(覺)[1938]』 등을 집필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화과원 인근지역에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교육 계몽도 실시하였다.

또한 3·1운동 때 만해와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였던 용성은 옥고를 치른 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혹한 일제 통치하에서 임시정부나 해외 독립군과 연관된 문헌자료를 남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현재 용성 선사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해방 후에 몇몇 사람들의 증언이나 정황 증거로 용성 선사가 민족해방운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용성 문도 및 그 관련자들은 용성이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고 줄곧 증언하였다. 그들은 용성화과원에서 생산된 과일이나 용유대에서 구워낸 막사발 등의 물품을 판매한 대금을 군산항이나 서울의 대각교를 통해 해외 독립운동에 지원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증언은 이러하다. 해방 후에 귀국한 김구 선생은 20일 만에 동지들과 함께 대각사를 방문하였다. 김구 선생은 귀국 후인 11월 28일에 의암 손병희와 도산 안창호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날 오후에 3·1운동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이자 임정환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권동진(權東鎭)을 오세창(吳世昌)의 사저에서 만났을 뿐이다. 귀국 후에 신중한 행보를 보인 김구가 12월 12일에 조소앙·이회영·김창숙 등 30여 명의 인사들과 함께 대각사를 방문하고, ‘대한민국 림시정부 봉영회’의 기념사진을 몇 장 남겼다. 대각사 측에서는 이날 김구 일행의 대각사 방문을 용성의 독립운동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용성 선사가 3·1운동 때 불교 측 대표로서 활약에 대한 감사인지, 혹은 그 후 독립운동에 대한 군자금의 지원에 대한 감사인지 확인할 근거는 부족하다.

[화과원의 내일은]

해방 후에도 용성의 법맥을 이어가던 화과원은 한국전쟁 때인 1952년경에 빨치산을 토벌하면서 소실되었다. 1969년이 되어서야 대한불교조계종 산하에 대각회가 조직되고, 서울의 봉익동에 대각회의 본부가 설치되었다. 그 후로 1970년대에는 화과원이 소재하였던 함양 백운산의 임야 16필지 104만 2,646㎡를 3차[1973·1974·1978년]에 걸쳐 대각회의 재산으로 등록하였다.

1978년 3월에는 용성의 문도였던 윤선효가 화과원 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윤선효는 1983년쯤에 화과원을 방문했는데, 당시 화과원의 정황을 “백운산 (해발) 600m쯤에 화과원의 옛터가 나온다. …… (한국)전쟁으로 모두 화를 입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 그 아래로 1㎞ 내려와 백운암이 있는데 …… 법상좌 성암 스님이 큰스님을 위해 창건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시 개울을 건너 150m쯤 아래로 옛날의 영은사 터화과원을 관리하는 관리소 겸 농막이 있다. 지금은 폐가가 되고 없지만 ……”이라고 묘사하였다. 이에 의하면 비록 화과원 유허지의 복원에 관심이 있었던 용성문도인 윤선효가 화과원장으로 발령을 받기는 하였지만, 5년여 동안에 화과원의 재건불사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와중에 용성의 유허지 복원은 용성의 생가가 있던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는 1983년부터 약 112억원을 투입하여 2007년 10월에 죽림정사의 낙성 법회를 가졌다. 이것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함양의 화과원에서도 용성의 손제자였던 혜원(慧圓)이 재건불사의 의지를 가지고, 1991년 11월에 주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992년 10월에 기공식을 가졌던 봉유대(鳳遊臺)는 거의 20년이 소요된 2011년 10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복원 불사의 점안식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함양 백룡성선사 화과원 유허지는 2000년 8월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229호로 지정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정부로부터 문화재 보수비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경상남도 함양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2015년 7월에는 ‘화과원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발기인 대회를 가졌고, 대정부건의안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근대 한국불교의 고승인 용성에 대한 추도는 입적 직후부터 다양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용성의 출가지였던 합천 해인사에서는 사리탑과 만해가 찬술하였던 사리탑비가 세워졌고[1941], 이것의 관리를 위해 용탑선원이 건립되었다[1945]. 정부에서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하여 ‘국가공로상[1962]’을, 불경의 한글화 공로를 인정하여 ‘은관 문화훈장[1990]’을 각각 추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2007년에는 생가가 죽림정사로, 2011년에는 화과원의 일부인 봉유대가 각각 복원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다채로운 추도 행사가 용성 선사가 추구하였던 교단의 혁신과 사원경제의 자립, 불교의 대중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불전이나 승탑의 대형화가 불사의 주류를 이루고, 출가자의 감소와 교단의 고령화로 인한 교세의 급격한 축소라는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용성 선사가 추구하였던 불교계의 혁신과 불교의 대중화는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물질적인 불사가 아니라 사부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인적 불사가 절실한 때이다. 한국 불교계의 자주화와 혁신을 위해 백운산 화과원에서 용성 선사의 자취를 곱씹어 보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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